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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관의 ‘국악-신반’ <21>윤하림 해금풍류 II <산조> 2023년 윤하림 해금풍류 I <영산회상> 음반을 출반한 성남시립국악단 상임 단원 윤하림 해금 연주자의 2번째 음반이다. 이 음반에는 1960년대에 발생한 류대봉, 임선문, 지영희, 한범수 명인의 산조가 수록되어 있다. ‘해금산조’는 100년에 가까운 시간 속에서 발생하였으며 1960년대는 공연과 음반계에서만 유통되던 산조가 교육계의 핵심적인 부분으로 자리 잡게 되면서 산조로서의 정형성과 틀을 완성한 시기로 해금산조의 확립기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해금산조’를 만든 인물은 류대복(1907-1964), 임선문(1913-1987), 지영희(1909-1980), 한범수( 1911-1984)명인이 있으며 자신의 ‘해금산조’를 만들어낸 이들은 당대에 해금이라는 악기를 섭렵한 예인으로 악기 특수성의 파악을 뛰어넘어 산조라는 독자적 음악 양식으로 ‘해금산조’를 창조해 낸 예술가들이다. 4가지 ‘해금산조’ 모두 동시대에 발생한 산조들이지만 개인의 음악세계나 지역적 특성에 따라 자신만의 가락을 형성한 것으로 장단구성, 음역활용, 악조구성 등 음악적 특징에서 차이가 나타난다. ‘류대봉, 임선문 해금산조’는 CD 음반으로는 처음 선보이는 산조이다. 1960년대의 ‘해금산조’ 4가지의 특징을 비교하며 감상한다면 4인 4색을 더욱 다채롭고 깊이 있게 즐길 수 있다. 이영섭의 창작음악 <바람으로부터> 영남대학교 음악학부 국악 전공 교수 이영섭 대금연주자의 창작음악 음반이다. 연주자의 4번째 음반으로 창작음악 음반으로는 첫 음반이다. 음반에는 연주자가 작곡한 다양한 구성의 7곡이 수록되어 있다. 연주자의 다양한 경험과 취향, 철학 등이 고스란히 담긴 고유한 색깔과 울림, 그리고 연주자 중심의 음악적 해석과 기법들을 작품에 녹여 내었다. 또한 오랜 시간 함께해온 연주자들과 깊은 교감은 아름다운 앙상블로 엮어져 마음에 바람을 새로이 일으키고 있다. 대금 독주곡 ‘호접지몽’ B플랫 대금으로 분다. 대금과 피아노 2중주 ‘Morning’, ‘Evening’은 D대금으로 연주하고 ‘A Hymn’은 단소와 피아노 2중주이다. 실내악 ‘나비의 꿈’에서는 B플랫 대금으로, ‘Wyndchase’(미국 렌트하우스의 이름)에서는 E플랫 대금, 마지막 ‘바람으로부터’ 곡에서는 소금을 연주한다. 곡 설명이 수록된 해설서는 자세하며, 대나무로부터 불어오는 소소한 바람이 우리들의 가슴에도 잠시나마 스쳤으면 하는 바람으로 음반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문가영 <취타풍류> 국립남도국악원 문가영 피리 연주자의 비매품 USB 음반이다. 음반에는 21:20 초의 ‘취타풍류’가 대금 이관규, 해금 박은서, 장구 김형주의 사중주로 수록되어 있다. 이 음원은 2023년 3월 18일 빛고을 아트스페이스에서 개최된 문가영 2번째 피리독주회 ‘취타’ 공연에서 ‘취타풍류’를 연주하였는데, 그 독주회가 끝나고 ‘취타풍류’ 녹음작업을 따로 하여 USB에 담은 것이다. ‘취타풍류’는 조선 시대 임금이나 고관의 행차, 군대 행진 때 사용된 음악이지만 지금은 감상용으로 연주되고 있다. 모음곡 형식으로 궁중의 ‘취타풍류’와 민간의 ‘취타풍류’가 그 구성이 조금 다르다. 이 음반에는 지영희 명인으로부터 전승되는 민간 취타풍류로 ‘취타-길군악-길군악 돌장-길타령-염불타령-삼현타령-별곡타령’ 7곡의 모음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해설서는 아주 간략하고, 음반 형태는 CD처럼 제작되었다. 이 음반은 USB 음반으로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일반 CD 케이스에 USB스테이션을 만들어 장착하고 있다. 처음 접하는 형태이다. USB 음반은 그 형태가 일정하지 않아 보관·정리하기가 난감한데 이렇게 제작하니 CD 장에 그대로 정리할 수가 있어 너무 좋다. 유성기음반 - 1925년 란란타령 <아릉렁고개뎡거댱짓고>-긴아리랑- 필자가 제작하고 있는 일제강점기 주요 아리랑 유성기음반 복제 사업으로 14번째 음반이다. 음반 뒤에 부착한 제작자의 글을 인용한다. 1925년에, 일본축음기상회의 3번째 녹음(1923년)으로 <란란타령>(일츅죠션소리판 K-137A. B) 1장(2면)이 출반됩니다. 그중 A면 <란란타령 아릉렁고개뎡거댱짓고>(노래:유운선. 이유색)를 복제했습니다. 음반 라벨은 2종류가 보이나 복제라벨은 나중에 나온 것입니다. 이 음반에서 <란란타령>은 지금의 ‘긴아리랑’입니다. 유성기(SP) 음반은 유성기로 들어야 제 멋을 느낄 수 있습니다. 유성기로 감상하기 위해 제작하였습니다. 본 음반은 영국(Vulcan Record Co.)에서 쪽반으로 제작하였습니다.(현재 양면 제작 불가) 음원은 제작자가 소유한 유성기 음반으로 제작하였습니다. 해설서의 가사는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채록했습니다만 완전하지 못합니다. 이해하기를 바랍니다. 이제 주요한 ‘아리랑’ 유성기 음반 복제사업도 막바지에 왔습니다. 끝까지 많은 성원 바랍니다. 유튜브 감상 : https://www.youtube.com/watch?v=5exBMS8yiw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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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br>주요한의 기록, 그 진실은?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가 주최하는 도산안창호포럼 제3집 ‘애국가 작사와 도산안창호’에는 대부분의 필자들이 ‘친일파 지식인’이란 규정하에 이병도 백낙준 서정주 윤치영”을 나열하고, 이어 "국학의 대가 최남선, 서지학자 황의돈, 안창호와 함께 상해에서 일했던 주요한 등이 안창호 작사설을 주장”했다고 하였다. 이 중에 주요한朱耀翰)은 ‘安島山全書’라는 방대한 저술에서 ‘애국가’ 항목을 두고 세 번에 걸쳐 작사자에 대해 거론한 인물이다. 그런민큼 누구보다도 주요한의 작사자에 대한 인식이 중요하게 된다. 이를 짚어 보기로 한다. 안창호의 생애를 다룬 대표적인 전기(傳記)는 이광수의 ‘도산안창호’와 주요한의 ‘安島山傳記’이다. 전자는 안창호를 "도덕주의자의 거울”로, 후자는 "민주적 지도자의 전형”으로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뿐만 아니라 이 두 자료는 애국가 작사자 문제에서도 평가를 받는다. 이 두 저자는 안창호가 임시정부 조직 초기부터 이광수가 귀국하는 1921년 2월 사이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직으로 함께 활동한 이들이다. ‘도산안창호’는 "작사자 문제 발화”로, ‘안도산전서’는 "작사자 문제 유지, 확산”의 저술로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자 즉, 주요한(朱耀翰 1900~1979)의 ‘安島山全書’의 평가 "작사자 문제 유지, 확산”의 평가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주요한은 외견상으로는 몰라도 내심은 애국가 작사자를 안창호라고 보지 않았음을 읽을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그 이유를 주요한의 발언을 순차화 하여 밝혀 보기로 한다.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주요한의 첫 발언은 네 가지 점에서 주목을 하게 된다. 하나는 작사자 문제가 발발한 후 첫 번째의 반응이란 점이다. 미국의 한 백과사전 출판사가 애국가 작사자의 연혁을 문의해 온 바, 공보처가 작사자를 안창호라고 통보하려 한다는 기사(서울신문)를 낸 것이 1955년 4월 4일 자이다. 그리고 주요한이 이에 대한 반론을 제기한 것이 4월 19일이기 때문이다. 둘은 안창호설에 대한 반론으로 대표적이란 점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안창호 작사설을 부인하는 것은 곧 윤치호를 작사자라고 반증하는 것임으로 쉽지 않은 처지이기 때문이다. 셋은 안창호의 최측근 중 한 명이란 점이다. 임시정부 시기와 흥사단 활동에서 이광수와 주요한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함께 했던 인물인데, 한 사람은 작사자로, 또 한 사람은 이에 반론을 제기했다는 점에서다. 넷은 주요한은 애국가 작사자를 판단할 전문소양의 소유자라는 사실이다. 임시정부 독립신문 편집장 시절 ‘적십자의 노래’ 등을 작사하고 ‘불놀이’를 발표한 시인이란 점이다. 주요한의 첫 발언은 이렇다. 경향신문 1955년 4월 19일 자 ‘애국가 작사자는 누구?’라는 기고문에서 매우 강한 어조로 안창호 작사설을 부인한 것이다. "안도산이 지었다고 하는 것은 세간에 널리 유포되고 있는 설이지만은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은 일종의 신화적인 설이다. 도산이 작사자라고 하는 직접적인 증명을 가진 사람을 필자는 아직 만나지 못하였다. 또한 도산 자신의 입으로 그러한 말을 하는 것도 들어 본 적이 없다.” ‘신화적인 설’이란 표현은 곧 "안창호가 작사했다는 주장은 듣도보지도 못했다.”는 강경한 부인이다. 이 결과는 가장 가까이에서 살며 안창호가 직접 "내가 작사했다”라는 말을 한 바도 없다고도 했다. 이는 "내가 작사하지도 않았다고 하는 말도 듣지 못했다”라는 억지를 배척한다. 특히 안창호가 직접 자신이 작사자라는 말을 하는 것도 들어보지 못했다는 말까지 하였다. 이는 이후 1963년 발간한 ‘안도산전서’에서도 "항간에서는 도산이 지었다고 믿는 이가 많으나~”로 기술하여 이를 견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의지적 표현은 주요한의 깊은 내심에서 나온 확신임으로 쉽게 변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두 번째 발언은 국사편찬위원회가 애국가 작사자조사위원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던 시기에 발표한 글에서다. 1955년 12월 조사위원회 일원으로서, 자신이 주관한 월간잡지 ‘새벽’에 발표한 ‘去國歌와 靑年學友會歌’란 글이다. 여기서 "그 委員會의 결론에 대해서 여기 言及하려는 것이 아니고~”라는 대목의 행간을 읽어보기로 한다. "文敎部에서 愛國歌作詞者調査委員會를 委囑하여 그 사무를 추진할 때에 筆者도 위원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었다. 그 委員會의 결론에 대해서 여기 言及하려는 것이 아니고, 調査途中에 딴 所得이 있기로 여기 披瀝하고자 하는 바이다.(중략) 그때 開城에 있는 韓英書院에서 찍어 내서 몰래 사용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거기는 약 2백餘篇의 唱歌가 수집되어 있는데, 推算年代로 보아서 물론 秘密出版이다. 이 唱歌集 속에 제1章은 愛國歌(동해물과 백두산이)로 되어 있고, 제2章 역시 愛國歌(성자신손 오백년은)로 되어 있다. 曲調는 두 가지가 같다고 하였고, 曲譜를 보면 스코틀랜드 民謠 올드랭사인(Auld Lang Syne)의 그것이었다. 그 밖에 韓末에 유행되던 여러 가지 노래가 수집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筆者는 ‘靑年學友會歌’라는 것을 발견했다.(중략) 다음에 유명한 ‘去國歌’도 이 두 책에 揭載되어 있다. 이 歌詞는 春園선생이 저술한 ‘島山安昌浩’에 收錄되었으나 그 歌詞의 行數가 節을 따라 맞지 않는 점이 있어 一部 漏落된 것으로 추측되었는데 敍上의 兩 唱歌集에 收錄된 것으로서 완전한 歌詞가 발견되었다고 생각한다.”(월간 <새벽>, <去國歌와 靑年學友會歌>, 1955, 12) 다소 길게 인용한 글은 주요한이 ‘도산안창호’의 내용을 파악했을 뿐만 아니라 그 대비로 ‘한영서원 발행 창가집’도 조사자로서 살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첫 번째 발언 "신화적인 설”이라는 단언은 적어도 이광수의 ‘도산안창호’ 기록을 분명하게 부정한 것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이 두 번째 발언의 "그 委員會의 결론에 대해서 여기 言及하려는 것이 아니고~”라고 한 소이를 알 수 있게 된다. 즉, 이미 작사자조사위원회에서 적어도 안창호가 작사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음을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다고 한 것에 다름이 아니다. 또한 한영서원에서 발행한 창가집의 "제1章은 愛國歌(동해물과 백두산이)로 되어있고, 제2章 역시 愛國歌(성자신손 오백년은)”라고 구분하여 인용한 대목에서 굳이 밝히지 않은 것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한영서원의 창가집에는 두 애국가의 작사자로 윤치호라고 밝혀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를 알 수 있게 하는 것은 작사자조사위원회가 결론을 윤치호로 내리게 한 근거 중 하나라는 것과 1916년 ‘경무부 보고 애국창가집 사건’ 기록에 ‘윤치호 舊作 애국가’라고 하였다는 사실에서다.(이후 1920년대 김종만 소장(所藏) 노래책에 애국가 작사자로 ‘윤선생 치호’로 표기되고, 가장 방대한 자료집인 1931년 한석원이 펴낸 ‘세계명작가곡집 무궁화’에 애국가 작사자를 ‘윤치호 작사’ 밝힌 사실에서 재확인이 된다.) 이를 주요한은 굳이 밝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주요한은 이 두 번째 발언의 행간에 "안창호는 작사자가 아니다”를 담은 것이다. 만일 작사자조사위원회의 결론이나 자신의 견해가 안창호가 작사자라는 확신을 하고 있었다면 굳이 이상과 같은 표현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에 "그 委員會의 결론에 작사자는 안창호라고 했는데~”라고 했어야 마땅한 것이다. 결국 두 번째 발언에서도 주요한은 내심으로는 입장 변화가 없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번에는 주요한의 저술 ‘安島山全書’에서 별도의 ‘愛國歌’라는 소항목을 두어 안창호 작사설을 확대, 재생산한 두 대목을 살피기로 한다. 먼저 살피는 것은 상해 임시정부 시절의 에피소드이다. 이의 진앙지는 이광수의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이다. 즉, "원래 이 노래의 시방 부르는 가사는 도산의 작이거니와 이 노래가 널리 불려서 국가를 대신하게 되매 도산은 그것을 자기의 작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다. "애국가는 선생이 지으셨다는데’하고 물으면, 도산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부인도 아니 하였다"”이다. 주목하는 것은 여기에서는 단순히 "대답이 없었다”인데 주요한은 다음과 같이 "웃고 대답이 없었다”라고 부연하였다. "항간에서는 도산이 지었다고 믿는 이가 많으나, 상해시대에 –이 노래는 선생님이 지으셨지요?-라고 도산에게 물으면 –웃고 대답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 에피소드의 시점과 장소는 주요한이 임시정부 ’독립신문‘ 편집 등으로 안창호와 이광수와 함께한 상황이다. 그러므로 이 내용의 여부를 알 수 있는 사정이다. 이런 점에서 주요한의 부연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즉, "웃고 대답이 없었다”라고 하여 소위 ‘소이부답(笑而不答)’이란 에피소드로 만들었다. 이 사자성어는 굳이 말로 알려주지 않고 웃음으로 대신한다는 뜻이나 일반적으로는 직접 대답하기 곤란하여 회피하는 모습이나 대응할 가치가 없는 질문에 예의상 대처하는 태도를 말하기도 한다. 이에 적용하면 결국 안창호가 지었다고 믿는 이가 많지만, 정작 안창호에게 작사했느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곤란하여 회피했다”인 것이다. 이 사정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내가 안창호와 함께 있었지만 들은 바가 없는 얘기이다.”라는 뜻을 피력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실상은 안창호 스스로가 작사자가 아니라고 말한 것과 같지 않느냐라고 한 것이기도 하다. 다음은 애국가를 대성학교 개교 후 안창호가 작사하고, 이를 윤치호가 지은 것으로 발표하여 확산시켰다. 다소 감동적인 이야기다.(이를 장리욱은 1983년 발행한 <偉大한 韓國人 安昌浩>(중앙서관, 118~119쪽)에서 그대로 인용하여 확산시켜다.) 그러나 전후 맥락을 살핀다면 흔한 말로 ‘카더라 통신’ 수준인데, 에피소드의 시점 등을 눈여겨 읽지 않으면 그렇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이야기의 시점은 대성학교 개교 이후라는 점과 오늘날에는 쓰지 않는 ‘대리교장’ 같은 용어의 이해이다. 대성학교의 개교 시점은 1908년 9월이고, 대리교장 또는 대변교장은 저명 인사를 내세워 학생모집 효과를 얻기 위한 방편이고, 개교 후에는 윤치호가 서울에 거주하기 때문에 평양의 안창호가 교장직의 대리를 맡아 쓰게 된 말이다. "대성학교 대리교장으로 있던 도산이 하루는 서울에서 내려온 교장 윤치호를 보고 ‘성자신손 오백년은’으로 시작하는 애국가에서 -이 가사가 적당하지 아니하므로 고쳐서 부름이 좋겠으니, 교장께서 새로이 한 절을 지어 보시라-고 청했다. 이에 윤 교장은 -미처 좋은 생각이 아니 나니, 도산이 생각한 바가 있는가?- 하매 도산이 책상 서랍에서 미리 써 놓았던 것을 꺼내 보인 것이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되는 애국가 첫 절이었다. 윤치호는 즉석에서 그것이 매우 잘되었다고 칭찬하였고 도산은 -그러면 이것을 윤 교장이 지은 것으로 발표합시다-라고 하여 그 뒤부터 대성학교에서 새 가사로 부르게 되고 나중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이해를 위해 다음과 같이 재구성하였다. 장소는 평양 대성학교 안창호 대리교장 사무실, 때는 1908년 9월 대성학교 개교 이후 어느 날, 등장인물은 서울에서 온 교장 윤치호와 평양의 대리교장 안창호, 개요는 안창호가 지어 두었던 "동해물과 백두산이~”하는 애국가를 서랍에서 꺼내 보이자 윤치호는 이를 좋다고 하자 안창호가 이를 윤치호가 지었다고 양보하여 발표하자고 하며 확산시켰다. 여기에 굳이 작품 이름을 추론한다면 ‘실패한 작사자 조작극’ 정도일 것이다. 매우 드라마틱하다. 안창호가 "윤 교장이 지은 것”으로 발표하여 명의(名義)를 넘겨주었다니 오늘이나 당시나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상황은 설정될 수 없는 것이어서 재미는 있으나 사실은 아니다. 결정적으로는 현 애국가가 ‘찬미가 14장’이란 이름으로 출판된 것이 1908년 6월인데도, 두 달이나 지난 뒤에 개교한 대성학교에서 가사를 두고 잘되었다고 하며 안창호가 작사한 것을 윤치호의 작사로 하여 발표하기로 하였다니 그렇다. 이런 이유로 주요한의 첫 발언에서 ‘신화적인 설’이라고 했다고 보는데, 이 극의 배경을 살피면 이 또한 그럴 수밖에 없음을 이해할 것이다. 우선 작사자 문제의 발화점인 ‘도산 안창호’의 본질적 문제이다. 뒤에서 상술하겠지만 이 책 여러 곳의 탈맥락적인 안창호 작사 언급 대목은 편집과정에서 원 저자인 이광수의 의도와는 다르게 박현환(‘도산 안창호’의 저자가 이광수가 아닌 ‘편집 겸 발행인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대표이다. 박현환은 안창호가 귀국하자 1922년 7월 귀국하여 이광수 주변에서 흥사단 활동을 도운 인물이고 해방 직후부터 한국전쟁 복구 시기까지 국내 흥산단 업무를 관장한 인물이다.) 같은 인물이 가필한 결과라는 것이 문제다. 대표적인 대목이 ‘상해시대편’의 "물으면 도산은 대답이 없었다”는 탈맥락적인 부분이다. 이에 따른 결론은 "전기소설에 근거한 안창호설은 원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된다. 두 번째 문제는 이 극의 대본이 ‘전문(傳聞)을 다시 전문’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주요한은 위의 인용문 앞에 이렇게 전재하여 알 수가 있다. "이에 대하여 안태국의 사위인 홍재형(洪在衡)이 장인에게 전해 들은 대로 기억하는 바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장인에게 전해 들은 대로 기억하는 바”에 의한 기술이라고 했다. 첫 발언자는 안태국, 이를 전한 이는 홍재형, 이를 듣고 주요한이 기록을 하였다. 첫 발화자 안태국(安泰國, 1877~1920)은 평양에서 나고 자란 인물로 대한제국시대 잠시 하급관리를 지냈다. 그리고 독립협회 평양지부에서 이강, 차리석, 최광옥, 이갑 등과 함께 활동하며 안창호와 연을 맺었다. 한일합방 후에는 계몽운동에 투신한 인물이다.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1916년에 만기 출감하였다. 3.1민족운동 이후에는 평양을 떠나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임시정부 내무총장 비서관직을 맡았다. 그리고 1920년 3월 병사했다. 이를 감안(勘案)한다면 이미 1920년 이전에 작사자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는 것이고, 이 시기 이전에 사위 홍재형한테 전했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1940년 상해 흥사단 원동지부 위원 정도로만 알려진 홍재형이 어떻게 장인에게 듣고 다시 이를 주요한에게 전했는지는 의문이다. 특히 1920년 이전 왜 이런 사실이 안태국만이 알고 있었느냐도 의문이다. 이런 점에서 ‘전언에 전언’을 통해 펼쳐진 대성학교를 무대로 한 ‘실패한 작사자 조작극’은 제목 그대로 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용, 살피려는 것은 임정시절 가사 일부를 수정하였다는 대목이다.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한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 11쪽에서 최남선이 언급한 부분이다. "만약 안창호가 문의를 하였다면 그 직위로 보면 주요한이 아닌 이광수에게 하였을 것”이라고 지적한 바가 있다. 주요한의 나이가 당시 20세라는 점에서 문제를 제기한 것은 타당하다고 본다. 역시 ‘안도산전서’의 ‘애국가’ 항목(93~97쪽)에서 4절의 일부를 수정했다는 것과 2, 3절에 대한 언급 대목을 살피기로 한다. "1919년부터 상해에서 ‘임군을 섬기며’ 대신에 ‘충성을 다하여’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분명히 도산이 고친 것이었다. 둘째 절의 ‘남산 위의 저 소나무’라든지, 셋째 절 ‘가을하늘 공활한데’와 같은 웅장한 구상은 도산의 머리가 아니고서는 나올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주요한, ‘안도산전서’, 1971년, 93~97쪽) 앞의 문장은 ‘찬미가 제14장’의 4절 중 ‘임군을 섬기며’를 현재의 ‘애국가’와 같이 ‘충성을 다하여’로 고친 것은 안창호라고 하였다. 이는 1919년 12월 1일 발행된 신한청년당 기관지 ‘新韓靑年’ 창간호 속 표지에 수록한 ‘애국가’ 4절에 ‘충성을 다하여’로 나오는 것으로 볼 때 적어도 임시정부 시기 수정된 것으로 볼 때 가능성이 높다. 이는 주요한이 작사자에 대한 유일한 단정적 표현에서 그렇게 볼 수가 있다. 그런데 다음 문장의 해석 문제는 주요한의 표현대로 추정 정도일 뿐인 것이다. 이상에서 작사자 문제를 확산시킨 ‘안도산전서’의 세 대목을 그 발화점인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와 대비하여 살폈다. 이를 두 가지 관점에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는 ‘도산 안창호’의 원천적 문제 제기이다. 이 책은 이광수가 쓴 원고에다 당시 ‘편집 겸 발행인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대표 박현환(나정 박현환(蘿井 朴賢煥)은 1892년 평안북도 철산(鐵山) 출신으로 평안북도 정주 오산 학교의 이광수의 후배이면서 제자로 일본 유학 후 오산 학교 교사로 일했다. 3. 1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하여 안창호, 이광수, 주요한 등과 흥사단 원동 단우로 ‘신한청년’과 ‘독립신문’ 편집 업무를 함께 하였다. 해방 직후에 흥사단 국내 위원부 재건에 앞장섰고, 흥사단의 해외 조직과 국내 조직 재건에 기여한 인물이다.) 이 ‘태극기와 애국가’ 항목을 삭제하고, 대신에 곳곳에서 덧붙여 가필(加筆)을 하였다. 그 결과 감동적인 기술과 표현으로 독자들에게 사실로 오해하게 하였다. 소설가적 성향을 발휘한 것인데, 박현환은 이광수를 따른 작가로 1920년대 초반 톨스토이 소설 부활을 ‘해당화’라는 제명으로 번역하여 출간한 바 있다. 또한 해방 후에는 흥사단의 국내 재건을 도맡은 인물이다. 이로서 이광수에게 전기소설 집필을 의뢰하고, 이의 편집과 출판을 주관한 인물이다. 그 결과 탈맥락적이고 산발적으로 작사자가 안창호라고 왜곡시켰다. 사실(fact)이 아니라 감동으로 가짜 역사를 만들어 낸 것이다. 다음은 경향신문 1955년 4월 19일자의 첫 발언, 1955년 12월호 월간 ‘새벽’ 기고문, 그리고 1971년 주요한이 편찬한 ‘안도산전서’ 에서 제시한 애국가 안창호 작사설의 평가이다. 정리하면 주요한은 첫 발언 ‘신화적인 설’을 번복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안도산전서’는 흥사단의 입장을 고려하여 부정하지는 않고, 인용하는 방식으로 단순 서술을 한 것 뿐이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주요한이 안창호설을 지지한 것으로 오독 할 수가 있다. 이는 위에서 살핀 바대로 주요한은 첫 발언 이후 이를 부인하거나 번복한 바가 없다. 결론적으로 주요한은 안창호가 작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단지 일부 사설을 수정한 바가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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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번째 '이즘한글서예가전시회... '아리랑 특별전'을 축하하며오늘 네번째 맞는 '이즘한글서예가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지난 2002년 제2회 이즘한글서예가전을 참관하고, 아름다운 한글서예 매력을 알게 되었습니다. 역시 우리나라 대표하는 서예단체 작품답게 다양하고 웅장한 작품을 보았습니다. 우리 민족의 문화적 자긍심을 지켜가는 이즘회 회원 작가들의 면모를 보면서 존경심을 감출수가 없습니다. 우리 문화의 정체성은 전통을 지키며 민족적 가치를 발현시켜 나가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그런 면에서 국악과 함께하는 서예는 우리를 우리답게 하는 주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한글서예는 서예문화권에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우월성을 나타내는 독보적 분야입니다. 저희 국악신문에서는 국악과 한글서예를 연계시키기 위해 매주 한글서예로 읽는 우리 음악사설'을 주간으로 연재하여 현재 200회를 앞에 두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시조 가사. 가곡 종목의 사설로 시작하여 지금은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 사설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독자들은 앞으로 신민요 시설은 물론, 창가와 가요 사설까지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 '한글서예로 읽는 우리 음악사설'코너는 주간 접속 수가 가장 높은 연재물입니다. 이는 서예술이 국악신문 독자들을 감동시킨 것이며, 우리 전통예술 서예술과 국악의 융합'이라는 성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동안 연재를 맡아주신 한얼 이종선 선생님의 서체의 기운은 물론, 깊고 풍부한 해설의 격조를 국악계가 받아 들이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국악신문 독자들이 한글서예에 다가갈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특히 오늘 이번 전시에는 '아리랑특별전'이 함께 열렸습니다. 남과 북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불리는 아리랑이 아름다운 한글서예와 만나 어떤 꽃을 피워낼까? 기대가 큽니다. 오늘 3월 꽃향기를 찾는 셀레임으로 '2004 이즘전' 그리고 그 속에 '아리랑특별전'을 우리 독자들과 전국 아리랑 식구들은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 아리랑 작품들은 전국 아리랑 전승지역과 국내외 동포사회에 널리 알리는 기회를 마련하는데 힘을 기울이겠습니다. 다시 한번 이즘전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24년 3월 13일 (주)국악신문사 대표이사 기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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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안창호 작사설’의 발화점1955년 5월 국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한 <愛國歌作詞者調査資料>(이하 조사자료) ‘안창호작사설’ 항목에는 2권의 책에서 인용한 것과 5인의 증언을 요약한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에 첫 번째 자료가 1947년 발행된 <도산안창호>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런 사실은 안창호의 애국가 작사설 발화지점은 위의 책에 있음을 알려준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우선 이 책이 발간된 1947년 이전에 안창호설이 제기 된 바가 없다는 사실과 이 책의 안창호설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었다는 사실에서다. 이 반론은 1948년 음악평론가 박은용(朴殷用)에 의해 안창호설은 잘못된 것으로 윤치호가 작사자라고 한 것이다. 이런 사실에서 안창호 작사설은 1947년 발행된 <도산안창호>에서 비롯된 것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책의 어떤 대목이 결정적으로 문제가 된 것인지를 살피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안창호 작사설의 발화에서부터 확산 과정을 살피기로 한다. 문제의 <도산안창호>는 전기소설이다. 이 책의 예언(例言) 첫 줄에는 "건국 초를 당하야 도산의 전기와 언행록을 요구함”이 있어 집필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를 요구한 것은 판권에 기록된 ‘편집 겸 발행인’인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일 것이고, 실제 저자는 성명을 밝히지 않았지만 1953년 한글 3판에서 밝혔지만 "춘원선생의 붓으로 이뤄졌다”고 하여 처음으로 표지와 판권에 이광수를 표기했다. 주인공 안창호와 이광수는 ‘민족개조론’을 둘의 합작으로 혼동할 만큼 상해 임시정부 초기 가장 가까운 사이로 집필자로는 적격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책에는 애국가가 언급된 곳이 다섯 곳이다. 산발적인데다 탈맥락적이어서 의외이긴 한데, 이 중에 <조사자료>가 인용한 내용은 다음과 같은 대목이다. 작사 배경이나 시기와 같은 것이 아니라 안창호는 애국가를 작사했음에도, 자신이 작사자라고 내세우지 않았다고 하는 내용이다. #1 "原來 이(애국가) 노래는 島山의 作이어니와 이 노래가 넗히 불려저서 국가를 대신하게 되매 도산은 그것을 자기의 작이라고 하지아니하였다. 云云” 이 내용의 원전인 <도산안창호>판권에는 ‘편집 겸 발행인’이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로 되어있어 이 인용 부분이 실제 이광수의 글인지, 아니면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 일원(一員)인지는 의문이 든다. 어떻든 이 책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2 "原來 이 노래는 島山의 作이어니와 이 노래가 넗히 불려저서 국가를 대신하게 되매 도산은 그것을 자기의 작이라고 하지아니하였다. ‘愛國歌는 先生님이 지으셨다는 데’ 하고 물으면 島山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否認도 아니 하였다.” 이 부분이 초판과 재판 <도산안창호>의 원문이다. 바로 안창호설의 진원지이다. <조사자료>가 생략한 부분인 "愛國歌는 先生님이 지으셨다는 데 하고 물으면 島山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否認도 아니 하였다.”가 의미심장하다. 이후 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난무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 내용은 진의를 모르는 일반 독자들에게는 안창호를 작사자로 믿게 하기에 충분했다. 시대적인 분위기상에서나 ‘민족 지도자’로 호명되는 안창호는 당연히 작사자가 되는 것에 이의가 없었다. 특히 읽을 거리가 많지 않던 해방직후 초판 1만부가 다 팔려 이듬해 11월에 재판을 발행했다는 정황에서 그 확산세는 대단했던 것이다. 그래서 안창호 관련 출판물에서는 당연히 이 내용은 인용되어 담론을 생산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출판물의 하나가 3년 후인 1950년 발행된『安昌浩雄辯全集』이다. #3 "상해계실 때에 학생들이 애국가를 선생이 지으셨다지요. 물으면 肯定도 不定도 아니 하시고 선생님은 웅변은 물론 음악을 좋아하시고~” 상해 임시정부 재직 시 평양에서 온 학생들이 작사자에 대해 물었지만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웅변과 음악을 좋아했다고 부연했다. 여기에서는 안창호가 애국가를 작사했다는 것보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를 표현한 문장이 맥락적이지 못하지만 단순한 인용은 아니다. 말하자면 박은용이 안창호설에 대한 문제 제기에 대해 해명 또는 변명의 의미가 있는 듯하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에서 살피는 인용 자료에서도 이 내용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어 그렇게 본다. 5년이 지나 1955년 초에 제기된 글이다. #4 "愛國歌를 안 先生님께서 창작하였습니까? 고 仰問함에 對하여 先生은 아무 대답도 아니 하셨다. 아마도 謙遜의 뜻이라고 생각 된다.” 1955년 4월 1일자로 발행된「信仰生活」에 김인서(金麟瑞, 1894-1964) 목사가 쓴 <愛國歌의 作詞者>에서 인용하였다. 이 글이 같은 해 5월에 발행된 <조사자료> 보다 앞서고, 문제의 서울신문 기사 4월 4일자 보다도 앞선다는 점에서 국사편찬위원회의 작사자 조사 이전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 된다. 이 대목은『도산 안창호』나『安昌浩雄辯全集』의 작사자 대목이다. 그리고 "애국가 작사자 문제가 있다”라고도 하였다. 유일하게 안창호설을 부인한 것이다. 그리고 대답하지 않은 이유로 말한 ‘겸손’이란 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극적으로 반론을 제기하였다. "만일 안 선생이 창작했다면 직언했을 것이다. 성일관(誠一貫)의 안 선생이 역사의 대(大) 문자(文字)에 대해 겸양의 침묵이 있을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작사자를 물었을 때 밝히지 않은 이유를 이어서 이렇게 주장했다."일제 압박 하에서 윤치호 선생을 애국가 작자라고 밝히지 못한 것은 그의 신변을 염려한 것이요, 일제 위력하에 무릎을 꿇고 있는 애국가 작자를 밝히면 애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도 윤씨작이란 기록을 볼 때 절의감(節義感)에 상처를 받았으나 역사는 고칠 수 없다.”안 선생이 말하지 않은 그만한 이유는 윤치호에게나 국민들에게나 상처(절의감)를 줄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매우 타당한 해석이다. 마지막으로 살피려는 것은 애국가 작사자 조사 초기 문제적 발언을 한 주요한의 기록이다. ‘문제적’이란 애국가 작사자 문제가 대두되자 "안도산이 지었다고 하는 것은 세간에 널리 유포되고 있는 설이지만은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은 일종의 신화적인 설이다. (중략) 도산 자신의 입으로 그러한 말을 하는 것도 들어 본 적이 없다”라는 발언을 말한다. 그런데 분명히 안창호 작사설을 부인하고 8년 뒤에 자신이 쓴 <安島山全書>에서는 이를 번복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에 주요한이 이렇게 단호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임시정부 초기 ‘애국가 수정안’ 논의 등이 있었던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음은 주요한이 같은 책에서 되풀이하여 인용한 대목이다. #5 "항간에서는 도산이 지었다고 믿는 이가 많으나, 상해시대에 -이 노래는 선생님이 지으셨지요?-하고 도산에게 물으면, 웃고 대답이 없었다는 것이다.” #6 "도산에게 –애국가는 선생이 지으셨지요-하고 물으면 도산은 笑而不答하였다는 의미의 말이 있다.” 첫 발언과 달리 주어를 ‘항간에서는’이란 제3자로 하여 인용 차원에서 언급하였지만 두 번이나 반영한 사실은 <도산안창호>의 흥사단 입장을 고려한 듯하다. 소위 ‘笑以不答’ 대목으로 웃고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주요한으로서는 이 진의를 알고 있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의 단정적인 첫 반응에서 만일 이것이 과하게 표현하였다거나 오류였다면 15년만에 쓴 책에서 과오를 인정하거나 수정을 하였을 것이나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소이부답’에 대한 우리의 이해 배경은 중국 시인 이백(李白)의 ‘所以不答 心自閑’과 제갈양(諸葛亮)의 ‘諸葛之能 不可量’에서 묻는 이의 의도와 다른 대답은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은 경우의 응대이다. 그래서 "내가 짓지 않았다”의 표현인 것이 된다. 첫 발언에서 보다는 후퇴한 표현이지만 그 기조는 유지한 것으로 볼 수 있어 결국 주요한 역시 이 책에서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에 소이부답한 것이다. 이상에서 동일한 에피소드의 확산 과정을 살폈다. 3곳에서는 안창호설 지지(支持)로, 두 곳은 안창호설에 기울어서, 한 곳은 안창호설의 반증으로 재인용하였음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구체적으로는 5곳에서는 단순 반복 인용이나 한 곳, 즉 김린서 목사의 이용에서는 강력한 반론을 견인하는 인용이었다. 결국 이 에피소드에서 얻은 교훈은 두 가지가 된다. 하나는 일제하에서 윤치호의 신변을 염려하고, 애국가의 운명을 우려해서다. 둘은 김구선생이 1945년 <대한국애국가>에서 작사자 이름을 밝히지 않고 끝내 ‘일명(佚名)하였다’고 한 것과 같은 이유이다. 이 시대, 오늘에도 되새길만한 제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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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태평양 40여 개국 무형유산 담당관 한국에 모인다문화재청(청장 최응천)은 유네스코(사무총장 오드리 아줄레), 유네스코 아태무형유산센터(사무총장 김지성, 이하 ‘아태센터’)와 함께 2월 26일부터 3월 1일까지 5일간 국립무형유산원(전북 전주시)에서 아시아 태평양 지역(이하 ‘아태지역’) 42개국 100여 명의 정부 및 유네스코 관계자를 대상으로 유네스코 무형유산보호협약(이하 ‘협약’) 정기보고서 작성 역량강화를 위한 아태지역 연수회(워크숍)를 개최한다. 무형유산보호협약은 유네스코 문화 분야의 대표적인 협약으로, 구전전통 및 표현, 공연 예술, 관습과 의례, 자연과 우주에 대한 지식 및 전통 공예 등을 보호하고 지속가능한 생명력을 보장하기 위해 전 세계 182개국이 가입하고 있다.유네스코는 최근 협약 이행을 평가하는 척도인 종합성과체계를 개발하여 이를 기반으로 한 정기보고서를 협약 가입일 기준으로 6년에 한 번씩 제출하도록 하고, 제출 단위도 개별국가에서 대륙단위 집단 제출로 변경하였다.아태지역은 올해 6월 30일까지 정기보고서를 제출하게 되며, 이에 이번 연수회는 새로운 기준과 체계를 반영하여 각 당사국 담당관들의 정기보고서 작성 역량을 향상시키는 데 초점을 맞춰 진행된다.현재 한국은 협약의 당사국 총회에서 선출된 유네스코 무형유산 정부간위원회 위원국으로서 세 번째 임기를 지내고 있으며, 선진적인 문화유산 보호 체계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와 유네스코의 무형유산 보호활동 지원에 앞장서는 등 모범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특히, 신탁기금을 통해 지난 2016년 유네스코의 정기보고서 양식을 온라인으로 바꾸는 시스템 개선에 기여하고, 2019년부터는 아태센터를 통해 해당 종합성과체계 이행 사업을 지원해왔다.이번 연수회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회원국들의 정기보고서 작성 역량을 키워주는 직접적인 기회이자,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국가 간 협력기반을 다지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행사는 비공개로 진행되지만, 정기보고서는 내년도 협약 정부간위원회 이후 온라인을 통해 누구든 확인할 수 있다.문화재청은 "앞으로도 국제사회의 무형유산 분야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지속가능한 무형유산 보호에 이바지해 나갈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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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愛國歌作詞者調査資料’, 윤치호 인정애국가에 대한 접근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기원 또는 명칭일 수도 있고, 형태나 내용에 대한 접근이 있을 수 있다. 특히 노래라는 점에서 전통성이나 전수 현상이 중요한 과제일 수 있다. 그런데 애국가에는 이런 과제와는 달리 의외적으로 우리 현대사와 관련하여 배태된 작사자 문제가 걸려있다. 이는 역경의 근대사를 함께한 애국가의 숙명이기도 하다. 보편적인 노래의 유통과 전승이 아닌 익명성과 의례성으로 전승된 특성으로 하여 작사자 여하(如何)는 중요한 과제로 오른 것이다. 이 때문에 국가 기관인 문교부 산하 국사편찬위원회가 이를 규명하기 위해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1년 반이란 기간을 갖고 조사를 한 바 있다. 그 결과 ‘작사자는 윤치호’라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그런데 한국전쟁 복구 중이 1956년 ‘국론분열을 우려하여’라는 정치적 이유로 이를 국가에서 공식화 하지도, 법제화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잠복되었던 ‘애국가 작사자 윤치호’ 문제는 90년대 들어 재론이 되었다. 1998년 정부수립 50주년, 국가상징연구회 창립5주년을 기념한 세미나 ‘國歌 愛國歌에 대한 再檢討’이다. 그리고 2017년 6월 한국 프레스센타에서 개최한 흥사단 주최 ‘애국가 작사자 규명 학술심포지엄’에서 김연갑이 발표한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이다’에서 학술적으로는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확정받았다. 그동안 반대론자들이 제기한 ‘譯述’의 해석 문제, 가사지의 ‘1907年 윤치호作’에 대한 오해, 이광수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의 오류 등을 해결하였음은 물론, 다음 세 가지 핵심 문제를 해결하였기 때문이다. 그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①독립신문 서재필 기록을 통한 ‘무궁화노래’의 윤치호 작사 확인 ②중앙대학교 안춘근(순흥 안씨)교수 발표 1904, 5년 필사 자료 3편의 위작 판명 ③국사편찬위원회 애국가작사자조사위원회 3차 회의 결과 ‘윤치호 작사 확인’ 등의 성과를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함에도 일부 흥산단과 좌파계열의 진영논리로 윤치호 자사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를 온전하게 인정하게 하는 데는 우선 윤치호 작사 사실에 대한 더 면밀하고 자료와 해설로 설득을 기울여야 한다. 이 글 역시 이런 의도에서 그동안 작사자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자료임에도 전체적인 조명이 도외시된 ‘愛國歌作詞者調査資料’를 재검토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조사위원회가 결성되기까지 얼마나 혼란이 격심했고, 그것의 해소가 얼마나 난문제였는가를 확인할 수가 있다. 길을 잃었을 때 길을 잃은 처음의 자리로 돌아가 다시 찾아야 한다는 사실에서 되돌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고자 하는 것은 ‘조사자료집’이지 ‘조사결과보고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부연하면 국사편찬위원회가 조사를 위하여 사전에 기본 자료를 취합하여 위원회 위원들에게 제공한 것이지, 조사 결과를 수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조사자료 중에 "내용이 현행 애국가와 동일한 者의 有無如何는 未詳임”(1쪽)이란 표현 등을 오해하여 "조사자료에 작사자 미상이라고 하였다”는 등의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愛國歌作詞者調査資料’는 제1쪽의 서문격의 글, ‘애국가화창 사례’, ‘애국가의 종류’, ‘작사설의 종류’, ‘부록’으로 구성되었다. 총 54쪽의 프린트본(가리방)이다. 목차는 없고 1쪽부터 본 내용이다. 서문에서는 작사자 거론 5인을 적시하고 세 가지 설(說)을 제시하였다. 내용의 첫 문장은 "現行愛國歌作詞者로 論義 되고 있는 인물로는 尹致昊 安昌浩 崔炳憲 金仁湜 및 閔泳渙의 五人이고 또한 單獨作詞說, 合作說 및 改作說이 있다.”고 하였다. 합작설은 최병헌과 윤치호의 합작설이고, 개작설은 민영환의 작사를 김인식이 개작하였고, 그 후 안창호가 또다시 개작했다는 설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개작설을 제기했데, 주요한과 이광수의 주장으로 상해임시정부 시기에 안창호가 개작하였다는 설이다. 이때 거론된 인물은 5인이고, 이들 대상의 단독작사설, 합작설, 개작설 세 가지가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애국가 화창(和唱) 사례 문헌과 신문 소재 애국가 기록을 3쪽에 걸쳐 인용하였다. 증보문헌비고 ‘악고’편에 광무4년 군악대가 애국가를 연주했다고 한 기록을 인용하였다. 한국법전 제2장 ‘의식’편에 1908년 애국가를 연주했다는 기록을 인용하였다. 신문으로는 대한매일신보와 그리스도신문(2회 인용)에 애국가와 황실가를 화창 또는 제창했다는 기록을 인용하였다. 전자는 8회, 후자는 2회 인용하였다. 문헌과 증언이 뒤석여 있다. 애국가의 종류 "애국가의 종류가 많았던 모양으로”라며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서북학회보를 인용하고, 김양선 목사와 장지영과 최남선의 증언을 수록했다. 애국가와 무궁화가와 국가 세 종류를 제시했다. 특히 1902년 학부(學部) 제정 에케르트 작곡 ‘대한제국애국가’와 관련한 기록과 위의 세 분의 증언을 통해 그 존재를 확인시켜 주었다. 가사 일부도 제시했다. 시선을 모으는 것은 이를 ‘애국가’가 아닌 ‘國歌’로 명기했다는 점이다. 이는 문제의 현행 애국가를 ‘국가’는 이니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는 있었음을 알게 한다. 작사설 서론에서 밝힌 5인에 관련한 작사설을 1955년 5월 13일 이전까지의 신문 기사와 증언 등을 분류하여 제시하였다. 민영환(2/1쪽), 안창호작사설(3쪽), 김인식작사설(1쪽), 최병헌작사설(1쪽), 윤치호작사설(6쪽) 순으로 관련설을 취합하였다. 윤치호 항목은 가장 많은 내용을 담았다. 이 윤치호설은 앞의 4인에서 제기한 설과 교차 검증을 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여 관심을 갖게 된다. 이 항목에 대해서는 다시 집중 분석을 하기로 한다. 부록 증보문헌비고와 한국법전 수록 애국가 기록과 독립신문 투고로 게재된 애국가 18편, 대한메일신보 잡보란 수록 무궁화가 2편과 애국가 수록되었다. 그리고 황성신문 ‘國歌調音’ 기사와 ‘대한제국애국가’ 가사를 수록했다, 단행본으로는 ‘한영서원 발행 프린트본 창가책 인용 애국가를 수록하고 백종섭씨 소장 창가책에서 애국가(찬미가 제1장), 현 애국가 가사를 인용하였다. 한편 서북학회보 ‘西友’에서 "학부에서는 애국가 통일 위원을 선정하였는데 위원 중에는 학부협판 윤치호의 이름도 있다.”를 인용하였다. 참고문헌 목록 21종의 참고문헌을 기록했다. 완조실록(王朝實錄-고종·순종 실기와 승정원 비서원, 규장각일기), 관보, 공사관기록, 독립신문 외 4종, 한국통사, 대한자강회보 외 2종 유년필독(幼年必讀 왜정시대 압수 책) 그리고 조선고가요집(朝鮮古歌謠集 손진태 편)이다. 의외인 것은 무가(巫歌)를 모은 ‘조선고가요집’이다. 이 시기 애국가를 수록한 해방 직후 발행의 노래책이 10여 종에 이르는데도, 이 같은 관계가 없는 무가집을 참고자료로 포함시켰다는 것은 위원회의 무성의함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愛國歌作詞者調査資料’는 5인에 대한 설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수집된 자료들을 5개 항목으로 정리했다. 이 중에 작사설 항목은 이 자료집의 핵심 주제로 구체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민영환부터 윤치호 작사설까지 살피기로 한다. 1. 민영환 작사설 민영환(閔泳煥, 1861~1905) 작사설은 두 사람의 증언에서 제기되었다. 장도빈(1888~1963)과 김동욱의 증언인데, 전자는 역사학자로 서울신문 1955년 4월 16일 자에 밝힌 내용이다. "거금 47, 8년 전 학생시대에 이미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애국가를 불렀다. 민영환 작이라고 들었다.”고 하였다. 1908년에 들었다고 하였다. 이 증언은 부정확하다. 현 애국가가 1907년에 작사되었기에 들었던 시기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민영환 작사로 거론된 것은 1902년 학부에서 제정한 ‘대한제국애국가’이다. 그러므로 장도빈은 현 애국가와 ‘대한제국애국가’를 혼동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증언도 하였다. "당시에 안창호작 애국가를 여러 번 들은 일이 있는데 현행 애국가는 아니었다”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안창호작’이 명확히 제시되지 않아 ‘거국가’인지 아니면 1908년 2월호 태극학보 ‘愛國生’이란 필명으로 발표한 ‘찬 愛國歌’인지, 또 아니면 신한민보 1910년 10월 12일 자 기사 ‘大韓魂’에 포함된 ‘애국가’인지 불분명하다. 다만 안창호 작사 애국가가 있을 수 있음을 유념하게 하는 동시에 현 애국가는 아니라는 사실도 확인해 준 것이다. 김동욱의 증언은 출전이 없다. 조사자료를 꾸미는 과정에서 취합한 증언인듯하다. 당시 86세로 "기미년에 윤치호씨와 더불어 애국가를 불렀다. 그러나 애국가 작사자는 민영환에 틀림없다”(8쪽)라고 하였다. 이 증언 역시 1902년 작곡된 ‘대한제국애국가’와 혼동한 듯하다. 이런 오해의 배경은 이 애국가 악보 서문에 "大師府會計局總長陸軍副將 正一品勳一等 閔泳煥”으로 되어있기 때문인 듯하다. 2. 안창호 작사설 안창호(安昌浩, 1878~1938) 작사설은 매우 관심을 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작사자 조사를 하게 한 원인 제공자이기 때문이다. 먼저 두 가지 출전이 제시되었다. ‘도산안창호’(1947. 5 30 刊)와 ‘도산안창호웅변전집’(1950 5 20 刊)으로, 여기에서 네 단락을 인용하였다. ①"도산이 상해 임정시대에 현행 애국가 가사 중 ‘임금을 섬기며’ 부분을 ‘충성을 다하야’로 修正하였다.” ②"원래 이 노래는 도산의 作이어니와 이 노래가 넓리 불려져서 국가를 代身하게 되매 도산은 그것을 自己의 作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다 云云” ③"애국가는 선생님이 지으셨다고 하는데 하고 물으면 도산은 對答이 없었다. 그러나 否認도 하지 않았다. 云云” ④"도산이 지은 노래는 여러 十篇이 있거니와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애국가가 가장 잘 된 作品이라 云云” 이상의 네 가지 주장은 모두 1947년 중반에 발행된 이광수가의 전기소설 <도산안창호>에 배경을 두고 있다. 이것이 안창호설의 한계이기도 한데, 관련 자료들 간의 교차 검증을 하면 다음과 같다. ①은 ‘신한청년’ 창간호에 게재된 애국가 4절에 ‘충성을 다하여’로 수정되어 나오니, 이를 안창호가 수정했다는 것은 가능성이 있다. 단 수정 시점이 창간호 발행 시점인 1919년 12월 이전이라는 단서가 충족되어야 한다. ②와 ③은 같은 맥락의 증언이다. 이 문제는 안창호가 언제 작사했는가와 왜 자신이 작사했으면서 이 사실을 숨겨야 하느냐 라는 물음에 답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제기된 안창호 작사 시기는 1908년 9월 26일 대성학교 개교 이후 윤치호 교장에게 안창호가 지은 것을 보여주고 후렴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양해를 얻어 발표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점은 윤치호가 애국가(찬미가 제14장)를 1908년 6월 25일 발행한 역술 <찬미가>에 수록한 이후라는 문제가 확인된다. 여기에다 "왜 자신이 작사했다는 사실을 숨겨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명료하게 답하지 못하는 문제도 있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안창호의 겸양 때문이다” 또는 "윤치호의 명성을 이용하여 널리 전파시키려는 의도에서다”라는 등의 말이 있기도 했지만, 이에 대해서는 이미 반론이 있는 상태이다. 그 하나가 조사보고서가 나오기 직전인 1955년 4월호 ‘신앙생활’에 밝힌 김인서(金麟瑞, 1894~1964) 목사의 강력한 반론이다. "만일 안 선생이 창작했다면 직언했을 것이다. 성일관(誠一貫)의 안 선생이 역사의 대(大) 문자(文字)에 대해 겸양의 침묵이 있을 수 없다. 그러면 왜 원작자를 밝히지 아니했을까? 일제 압박 하에서 윤선생(윤치호)을 애국가 작자라고 밝히지 못한 것은 그의 신변을 염려한 것이요, 일제 위력 하에 무릎을 꿇고 있는 애국가 작자를 밝히면 애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도산 안창호>의 내용에 대해서는 조사자료에서도 제기되었다. 그것은 이광수의 두 번째 부인 허연숙(許英肅, 1897~1975)이 1955년 4월 20일 자 자유신문에 증언한 것으로, 윤치호의 딸이 이에 대해 問議해와 이광수가 설명하여 해득시켜 보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와는 상반된 증언이 있다. 윤치호 작사설 자료에 수록된 주영환(朱榮煥)의 서면 증언이다. "이광수의 도산전기에 애국가 작사자를 안창호 씨라 한 것은 이광수의 실책이다. 출판 후 춘원은 안영자 씨를 통하야 訂正할 기회를 만들기로 하였으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광수는 반민족행위특별법에 의한 처벌을 받는 등 수난을 당하다 6,25 전쟁 혼란 와중에 납북을 당했다. 이런 상황임으로 ‘도산안창호’의 내용을 수정할 수 없는 처지를 말한 것이다. 이로서 안창호의 가장 중요한 증언은 윤치호 딸의 오류에 대한 항의가 있었다는 사실로 증거력이 상쇄된 것이다. 이상과 같이 가족이나 친지의 증언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감정적이어서 반드시 교차 검증을 거쳐야 한다. 안창호 측은 허영숙의 증언만을 거론하나 이 같은 대비로 평가가 달라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 전기소설과 관련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아주 근원적인 문제인데, 앞장 ‘도산 안창호’의 해악(害惡)‘에서 밝혔듯이 이 ‘도산 안창호’는 애국가와 관련해서는 이미 문헌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상태라는 점이다. 되풀이하지만 이광수의 글이라면 이렇게 파편적이고 탈맥락적일 수가 없는 데다 ‘살아있는 태극기와 애국가’라는 소제목의 글에서 이 내용이 생략된 사실에서와 같이 편집과정에서 가필과 삭제가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어서 주요한(朱曜翰, 1900~1979)의 중장이 있다. 조사자료에는 두 가지 증언을 수록했다. 경향신문 1955년 4월 19일 자 기고문 ‘애국가 작사자는 누구?’에서 제기한 것을 인용한 것인데, 하나는 상해에서 안창호가 ‘임금을 섬기세’를 ‘충성을 다하여’로 改作을 하였을 때 자신에게 問議(9쪽)하였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주장에 대해 같은 조사자료 같은 항목에서 최남선이 "만약 안창호가 문의를 하였다면 그 직위로 보면 이광수에게 하였을 것”(11쪽)이라고 지적을 하였다. 이는 주요한의 나이가 20세라는 점으로 보아 최남선의 지적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는 대성학교 교원이었던 김동원(金東元)으로부터 들었다는 말이다. 그 내용은 대성학교 시절 안창호가 윤치호의 ‘성자신손’(무궁화노래)을 ‘동해물과 백두산이’(애국가)로 개작하였다고 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선 여러 편의 글에서 밝혔듯이 대성학교가 개교하기 이전에 윤치호는 역술 <찬미가>에 수록, 발표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함에서 이런 주장은 원천적으로 무시될 수밖에 없는 낭설인 것이다. 다음은 최일봉(崔日鳳)이 서면(書面)으로 제출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하나는 자신이 의주 강연에서 안창호가 자기가 지었다는 "애국가를 배워주었다 云云”이라고 한 부분이다. 또 하나는 같은 맥락의 주장으로 안창호가 임정시절 내무총장 비서실에서 "이유필(李裕弼) 입회하에 안창호 선생은 애국가는 내가 창작자야 하고 언명하였다. 云云”한 것이다. 전자는 자신의 경험이나 이의 진정성은 의문이 된다. 그리고 후자는 안창호설의 상투적인 주장이라 위의 김인서 목사 주장으로 답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허영숙 씨의 증언을 살핀다. 두 가지를 인용했다. 하나는 ‘도산안창호’의 내용에 대해 윤치호 측에서 이광수에게 문제를 제기했으나 해득하고 돌아갔다는 것과 자신이 진명학교 시절 김인식으로부터 음악을 배웠다고 하며 "도산이 作詞하야 愛蘭 민요곡을 부쳐서 부르다가 김인식 씨가 음악가로서 名聲이 있었으므로 作曲을 부탁했던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전자는 앞에서 교차 검증을 통해 살핀 바와 같고, 후자는 문맥상 애매하여 논의 할 필요를 갖지 못하나 김인식설의 배경 정도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3. 김인식 작사설 음악교육가 김인식(金仁湜, 1885~1963)은 국사편찬위원회가 작사자를 조사하게 되었을 때 크게 관심을 둔 인물이다. 직접 직원이 방문하여 증언을 청취하기도 했고, 음악평론가 이상만(李相萬, 1935~)이 방문하여 인터뷰를 하기도 하였다. 이런 관심을 끌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점에서 인데, 하나는 1907년을 전후한 시기 여러 학교와 기관에서 지도한 음악가이고, 둘은 1955년 당시 작사설 거론자 중 유일한 생존자라는 점에서다. 그의 활동은 우리나라 근대음악사의 초기 상황에서 종횡한 음악가이다. 김인식은 1896년 감리교에서 경영하던 평양 숭덕학교(崇德學校)에 입학하고, 그 뒤 숭실중학교에 진학하여 선교사 부인인 헌트(Hunt)와 정의여학교(正義女學校) 교장 스눅(Snook)에게서 성악·오르간·악전을 배웠다. 이후 바이올린과 코넷까지 배웠는데, 오르간 연주는 뛰어나 숭실중학 3학년 때 1학년 음악수업을 맡을 정도였다. 1907년 미국 유학 준비차 상경하였다. 그런데 서울의 여러 사립학교에서 음악지도를 요청받고 교사로 활약하게 되었다.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부설 상동청년학원 중학부에서 서양음악을 지도하는 한편, 진명(進明)·오성(五星)·경신(儆新)·배재(培材) 등 여러 사립학교에서도 서양음악을 지도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합창단인 경성합창단(京城合唱團)을 종교교회(宗橋敎會)에 적을 두고 활동하였다. 이런 활동상에서 애국가 작사설의 인물로 시선을 끌만 하였다. 조사자료에는 1908년에 진명여학교 창립기념에 쓰기 위해 ‘애국가’란 제목으로 작사를 하였다는 주장을 하였고, 이에 대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세브란스의전에 다니던 박서양(경성합창단 단원)이란 학생이 부르는 ‘성자신손~ 운운’하는 "皇室歌(作者不明)를 듣고 이것에서 힌트를 얻어 작사·작곡을 하여 기념식에서 불렀고, 그 후 기호학교에서도 가리쳤다.”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7년 후에 작고하였음에도 작사자로 제외가 되었다. 이에 대한 사정과 문제점에 대해서는 이미 필자가 1998년 발간한 <애국가 작사자 연구>에서 상술하였지만, 요약하면 이렇다. 첫째, 1907년을 전후한 당시 윤치호와는 YMCA 활동과 한영서원 하기 음악강습 교사 활동, 그리고 종교교회와의 관련에서 윤치호 역술 <찬미가> 제14장의 존재를 모를 리가 없었다는 점. 둘째, 1910년 경신학교 교사 재직 시 <보중친목회회보> 창간호에 발표한 <애국가>가 무궁화가 가사에 자신이 작사한 것을 더하여 ‘올드랭 사인’곡으로 발표하며 ‘김인식 작사’로 한 바가 있다. 이것이 현 애국가가 아니라는 점. 셋째, 이 같은 사실을 생존 시에 밝히지 않았다는 점. 넷째, 작사자조사위원회의 출석 증언 요청을 거부하였다는 점. 마지막은 남긴 일기에 "찬송가에 손을 얹고 작사하였다”라고 하였지만, 그 일기를 쓴 일자가 작사자 조사 직후라는 점 등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외 김인식설에는 김한규 고유상 홍만유, 그리고 당시 진명여학교 학생 3인의 증언도 있다. 이는 모두 ‘김인식 작사’에 대한 오해의 결과이고, 김인식 작사의 다른 작품들과의 혼동에서 결과한 것이다. 한편 증언자 중 출판인 회동서관(淮東書館) 사장 고유상(高裕相)이 관심을 끌지만, "김인식 작 창가책 소형이 있었다”는 단순한 증언일 뿐이었다. 실제 김인식 명의의 악보집과 창가책과 악전(樂典)이 있지만 거기에 애국가는 들어있지 않았다. 여기서 김인식 작사로 발표된 애국가(KOREA)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애국가>(KOREA)는 8·6조 시형에 곡조는 ‘올드 랭 사인’이다. 이는 현 애국가와 같은데, 노랫말을 의외로 두 부분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一 華麗江山東半島는 우리本國이오 稟質됴흔檀君子孫 우리國民일셰 無窮花三千里 華麗江 大韓사람大韓으로 길이 保全하셰(후렴) 二 愛國하는 義氣熱誠 白頭山과 갓고 忠君하는 一片丹心 東海갓치깁다 三 二千萬人오직한마암 나라사랑하야 士農工商貴賤업시 職分을다하셰 四 우리나라우리皇上 皇天이도으샤 萬民同樂萬萬歲에 泰平獨立하셰 총 4절에서 1, 2절은 김인식 작사이고, 3, 4절은 윤치호 작사 ‘무궁화가’의 3, 4절이다. 이 1, 2절을 언제 작사하여 재구성하고 학생들에게 가르쳤는지는 모르지만 윤치호가 ‘찬미가 제14장’(현 애국가)을 작사한 1907년 중반 이전이라고 보게 된다. 이는 다시 밝히겠지만 화가 김은호의 회고록 ‘書畫百年’에 윤치호 작사 증언 부분에서 김인식이 등장하는 대목이 있어 추정이 된다. 그런데 이 <애국가>는 일제강점기를 거처 해방에 이르기까지 전승된 것이 확인된다. ‘예술통신’ 1947년 2월 10일 자 ‘愛國歌 其二’로 나오는 것은 물론 몇몇 필사본에도 수록되어 전해지는 것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정황에서 확인하듯이 김인식은 당시 애국가 작사자 규명에 진실을 밝힐 수 있는 결정적 인물이었다. 분명하게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무궁화가’에다 가사를 더해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우를 범하는 바람에 이것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증언을 거부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음악가로서, 생존 인물로서 역사적 소명을 다하지 못하였다. 이는 애국가 작사자 문제에서 가장 안타까운 장면이기도 하다. 4. 최병헌 작사설 최병헌(崔炳憲, 1858~1927)은 애국가의 본문은 최병헌의 ‘불변가’에서, 후렴구는 윤치호의 '황실가'(무궁화가)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소위 ‘윤치호·최병헌 공동작사설’의 인물이다.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 최병헌 항목에는 최황(崔晃) 등 가족 2인의 명의로 제출한 자료가 요약되어 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1905, 6년 경 정동 자택에서 남산을 바라보고 작사했다. ②윤치호와는 독립협회 때부터 친교, ‘황실가’ 후렴을 빌려 ‘하나님이 보호하사’ 애국가를 작사했다. ③윤치호는 기독교인이 아님으로 이런 표현을 쓸 수가 없다. ④윤치호는 최병헌의 권유(勸誘)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작고 28년 후의 후손들이 제출한 자료이니 오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③과 ④같은 내용은 어불성설이다. 윤치호는 최초의 감리교 세례교인으로 최병헌 보다 입교가 12년이 앞선다. 최남선이 이를 교정시켜 주었다. 윤치호가 독립협회 회장 시기 최병헌은 주사직에 있었다. 가족들의 주장이 얼마나 허술한지를 알 수 있다. 이를 견준다면 앞의 두 가지도 신뢰하기가 쉽지 않다. 신흥우(申興雨, 1883~1959)의 증언도 있다. 12세 때 배재학당(培材學堂)에 들어가 신학문을 익히면서 개화사상과 기독교와 서구 문물을 접했다. 1896년 서재필, 윤치호, 이승만 등의 개화 청년들이 조직한 협성회(協成會) 청년부에 가담하여 계몽 운동을 벌였다.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에도 소년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이후 위의 인물들과 정치 토론을 벌이며 근대화운동을 전개해나갔다. 그러나 불량한 학생으로 오해를 받아 대한제국 정부의 감시를 당하기도 했다. 영어 실력이 출중하여 1903년 선교사를 통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유학한 뒤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정치학과 법률학을 공부했다. 1911년에 귀국하였다. 그러나 1년 만인 1912년 식민지 현실에 분개하여 다시 망명을 하려 했다. 이에 윤치호의 권고로 망명을 단념하고, YMCA 이사가 되고, 배재학당 교장을 맡았다. 이상과 같은 이력에서 작사자에 대한 코멘트를 할 만한 동시대 지식인임은 분명하다. 조사자료에는 자신이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정초식에 14세로 참가하여 ‘독립가’와 ‘진보가’를 불렀다고 하였으며, 작사자에 대해 이런 증언을 하였다. "1903년부터 1911년까지 滯美 中에는 안창호작이라 들었고, 귀국 후에는 윤치호 작이라고 들었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상황은 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1908년 윤치호 역술 ‘찬미가’가 발행된 시기 직후 미국과 하와이에서는 신한민보 등에서 애국가 또는 ‘국민가’(동일 가사)의 작사자를 윤치호로 표기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 증언에 가치를 둔다면 1910년 전후 미국에서 안창호가 작사자라고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는 사실이다. 5. 윤치호 작사설 윤치호(尹致昊, 1865~1945)는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교육자·정치가·저술가·개신교 운동가·계몽 운동가·언론인·독립협회·만민공동회·신민회·청년학우회의 일원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한국 최초의 남감리교 신자이자 초기 개신교의 세례교인이다. 개화파로 독립신문사의 창립 인사 중 한 명이자 제2대 사장이며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통해 계몽운동, 민권운동, 의회설립운동을 벌이고, 황제에게 불충(不忠)하는 역적으로 취급 받고 민중들의 배척을 받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민중을 경멸하였고 노선을 변경하여 실력 양성론에 매진하다가 흥업구락부, 수양동우회, 청구구락부 사건, 일제경찰의 미행과 내사 등을 견디지 못해 친일로 전향하였다. 애국가 작사 문제는 문헌과 증언과 상황이 확정에 이르는 단계이지만, 친일 프레임에 발목을 잡혀 공론화되지 못하고 있다. 윤치호작사설 항목은 다양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네 개의 그룹인데, 하나는 한영서원 제자들의 증언, 둘은 가족의 주장, 셋은 지인들의 주장, 넷은 평론가 또는 제3자의 증언이다. 이제 각 측의 주장과 앞의 네 작사설을 교차검증하여 증거 자료의 가치를 확인하기로 한다. 한영서원 제자 신영순(申永淳) 외 3인의 증언이 비중 있게 수록되었다. 우선 ‘特別讚美歌集’ 즉, 초판 ‘찬미가’의 존재를 알려 준 것으로 의미가 크다. "제1장이 국가(영민요곡), 제2장이 황실가(영민요곡)이고, 그 다음이 독립가와 신병가 등이었는데, 곡조는 찬송가 곡이었다”라고 하여 재판과는 다른 편재를 확인시켜 주었다. 이렇게 판단하는 것은 첫째 제1장이 국가(KOREA), 제2장이 황실가로 편제된 점, 둘째 재판 ‘찬미가’에 없는 찬송가 곡조의 ‘독립가’와 ‘신병가’가 수록된 점, 셋째는 현 애국가가 수록되지 않았다는 점, 이상의 세 가지를 들어 재판과 다른 초판으로 보게 하는 것이다. 특히 현 애국가가 수록되지 않아 작사 시점이 1907년이란 점을 보강해주기도 한다. ‘찬미가’ 초판은 1906년 10월 ‘한영서원(韓英書院)’ 개교 첫 입학생 14명에게 배포하기 위해 소규모로 출판을 했고, 1907년 작사한 현 애국가 외 2편의 ‘애국적 찬미가’와 12편의 번역 찬송가를 포함하여 재판을 1908년 6월에 발행하였다. 이의 존재를 바로 한영서원 학생들의 체험적인 직접증언으로 확인시켜 준 것이다. 이어서 1913년 "창가를 수집하여 비밀로 노래책을 출판하였다가 투옥되고 압수를 당했는데. 제1권 제1장 ‘애국가’에는 윤치호 작이라고 명기 되었다”라는 증언도 있다. 이 창가집의 실물이 없어 사실 여부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 노래책에 대한 ‘창가책사건’ 관련 기록에는 ‘윤치호 작 애국가’라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사실로 받아드일 수 있을 것이다. 제자 최규남의 증언 역시 매우 구체적이다. 9세로 한영서원 다닐 때의 경험을 진술한 것인데, "한영서원 벽장문에다 동해물과 백두산이라는 지금의 애국가를 붓으로 써 부치고 선생 朴嶼陽(강화출신)씨가 우리에게 가리켜주며 이것은 윤원장(윤치호)이 만드신 것이라고 수차 말한 것을 기억한다”고 하였다. 제자 김동성도 50년 전부터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라는 것을 명백히 알고 있었다며 "학생들은 매일 아침 윤선생(윤치호)이 만든 애국가를 불렀다”는 취지의 주장을 하였다. 두 명의 또 다른 제자는 ‘唱歌集’과 ‘讚美歌冊’을 언급하였는데, 이는 윤치호 역술 ‘찬미가’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혼동을 한 부분으로 판단된다. 다른 인물들의 작사설과는 다른 전문가의 증언이 있다. 박은용과 주영환이다. 평론가 박은용(朴殷用)은 동아일보 1948년 10월 6일 자 ‘愛國歌考’에서 윤치호가 1945년에 남긴 ‘자필 가사지’의 증거력을 통해 윤치호 작사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이 주장은 1947년 발행한 이광수의 전기소설 ‘도산안창호’의 오류를 이미 7년 전에 지적한 것이다. "윤치호 씨가 현재 아무리 불미한 입장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애국가를 작사한 사실까지를 무시하고 거짓으로 도산 선생 작품을 만들 필요는 없다” 좌익계 음악평론가의 이 질타는 친일파 척결이라는 첨예한 시점에서 시류에 따라 안창호가 민족지도자라는 이유로 애국가 작사자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한 것이다. 주영환(朱榮煥)은 다음 세 가지 사실을 들어 윤치호 작사 사실을 주장했다. 하나는 기자협회보 3호에 서정주가 쓴 ‘청년 이승만’에 "이승만 박사로부터 친히 口傳을 받은 筆記”에 근거하여 윤치호를 작사자라고 한 사실, 둘은 1908년 재판 윤치호 역술 ‘찬미가’ 제14장에 현 애국가가 수록되었다는 점, 셋은 윤치호 자손이 이광수에게 정정을 요청했다는 사실이다. 이 세 번째는 앞의 안창호설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광수의 부인 허영숙의 증언을 상쇄시키는 것으로 의미가 큰 증언이다. 윤치호작사설에 특이한 두 인물의 주장도 있다. 백락준과 최남선으로, 백락준(白樂濬, 1895~1985)은 애국가 작사자 조사를 주관한 문교부 전임 장관을 역임한 인물이다. 증언은 서울신문에서 밝힌 내용을 인용한 것인데, 자신이 윤치호로부터 직접 받은 ‘찬미가’를 통해 작사자는 윤치호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 ‘찬미가’를 6.25 때 분실했다고 하였다. 당시 조사위원회에서는 이 책을 찾는다는 기사를 낼 정도로 결정적인 증거력을 지닌 자료였다. 최남선의 증언은 간단명료했다. 그러나 매우 큰 효력을 발휘한 증언이다. 윤치호 가족 측에서 1945년 작성한 ‘자필 가사지’의 ‘一九0七年 尹致昊 作’ 표기 문제, 철자법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이에 대한 평가를 한 것이다. "<一九0七 尹致昊作>이 眞이라면 윤 씨 작이라 하여도 無妨할 것이다” ‘1907년 윤치호 작’이란 표기는 가사를 쓴 시점이 아니라 작사를 한 시점을 밝힌 것이기에 서법에 문제가 없다는 것, 그리고 윤치호가 이른 시기에 어문법에 관심을 보인 인물임으로 역시 문제가 없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이 ‘자필 가사지’가 윤치호가 직접 쓴 진적(眞籍)이라면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라고 봐도 무방하다는 주장이다. 이 최남선의 증언은 조사위원회가 결성되어 위원으로 활동하는 동안 유지된 기조이다. 첨언한다면 최남선은 조사자료 ‘애국가의 종류’에서 ‘대한제국애국가’와 현 애국가는 다른 것임을 분명히 밝혀 전문가적인 소견을 피력한 인물이다. 윤치호작사설 주장의 의미 있는 그룹은 윤치호 가족들이다. 사위 정광현, 이복 동생 윤치왕이 그들이다. 정광현(鄭光鉉, 1902~1980)은 윤치호의 셋째 사위이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작사자 조사 기간 두 번에 걸쳐 의견서를 제출할 만큼 적극적인 활동을 한 가족 일원이다. 조사자료에는 ‘찬미가’ 재판의 존재를 제시하고, 1945년 작성된 윤치호의 ‘자필 가사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였다. "佐翁 筆跡의 애국가는 1945년 作故하기 전에 가족들의 請으로 讚美歌集에서 베낀 것이다. 謄寫할 때 綴字法도 多少 고치고 또한 ‘임금을 섬기며’의 句는 이미 改作한 것이라 하야 現 歌詞로 고쳐 썼다.” 윤치호 작사 사실을 입증하는 가장 증거력이 큰 사료인 ‘자필 가사지’의 작성 배경으로 의도적으로 남긴 것이 아니라 가족들의 청에 의해 기념으로 남긴 것이란 사실을 밝힌 것이다. 더불어 ‘찬미가’ 제14장 4절 가사 중 "님금을 섬기며”가 "충성을 다하야”로 바뀐 이유에 대해 가족들이 바뀐 부분 대로 쓸 것을 청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밝혔다. 이로서 <찬미가> 제14장과 차이나는 문제를 해소한 것이다. 윤치왕은 1907년 "애국가 ‘백두산이’(영국민요)를 지어 학교에서 부르고 소책자로 박어서 분배”했다고 ‘찬미가’의 존재를 증언했다. 이상에서 살핀 5인에 대한 작사설을 조사하기 위해 작성한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를 분석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이 조사자료는 1955년 4월 2일 자 경향신문 기사로 촉발되어 5월 13일 자료집을 발간하고 조사가 시작되어 1956년 8월 31일 최종회의에서 윤치호를 작사자로 결론 내는데 활용하였다. ②작사자로 거론된 인물은 윤치호 안창호 최병헌 김인식 민영환 5인이며 단독작사설 합작설 개작설이 있었다. ③주요 내용은 애국가 화창(和唱) 사례, 애국가의 종류, 작사설, 부록, 참고문헌 목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④ 각 작사설을 요약하며 다음과 같다. 민영환 설은 1902년 에케르트(Franz Eckert, 1852~ 1916) 작곡 ‘대한제국애국가’ 악보집 서문에 이름이 올라있는 것에 대한 오해로 비롯되었다. 최병헌 설은 ‘불변가’라는 시에서 남산을 본 감상을 더해 작사했다고 하나 이 원작은 확인이 되지 않아 가족들이 제기한 설일 뿐이다. 음악가 김인식의 작사설은 윤치호의 ‘무궁화가’ 3,4절에 자신이 지은 1, 2절을 구성해 1910년 발표한 ‘愛國歌’(KOREA)를 오해한 제자들 유포한 설에이를 철회하지 못한 본인이 주장한 설이다. 안창호 설은 이광수가 지은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에서 비롯되었다. 1908년 9월 대성학교 개교로 윤치호가 교장으로 왔을 때 안창호가 지은 현 애국가를 보여주고 양해를 받아 발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안창호가 윤치호에게 보여주고 후렴을 사용하는 것에 양해를 얻었다는 시점이 이미 윤치호가 작사하여 역술 ‘찬미가’에 수록, 발간한 이후여서 시점이 문제가 된다. ‘찬미가’가 발행된 것은 3개월 전이 1908년 6월이기 때문이다. 이는 에피소드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되는데, 바로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의 애국가 관련 기사의 탈맥락상과 연동이 되는 것으로 안창호 설은 근거를 잃게 되었다. 이 역시 대성학교 학생들과 임시정부 관련자들의 오해에서 비롯된 설인 것이다. 윤치호 설은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만으로도 작사 사실을 확정할만하다. 홍색 표지의 초판과 재판 역술 ‘찬미가’가 제시되었고, 1945년 작성된 ‘자필 가사지’까지 제시되었다. 또한 한영서원 제자들의 구체적인 증언이 있고, 가족들의 확신으로 자료가 제시된으로서 작사 사실을 입증하고도 남는다. 거론한 이들은 상호 보완적인 역활을 하여 작사자가 윤치호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사실 한 두 가지의 자료만으로는 그 진실을 주장하기에 부족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상과 같이 증거자료와 증언의 부합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결국 이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는 거의 윤치호가 작사자라는 사실을 전제로 작성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1년 6개월간의 3차에 걸친 조사위원회 회의는 이 자료집에서 제시한 윤치호 관련 자료와 증언의 교차검증 과정이기도 하였다.(물론 조사과정에서 1910년 신한민보 ‘국민가 윤치호 작’ 자료 등 확인) 이런 점에서 이 자료집은 윤치호 작사 사실을 확정하는데 결정적인 자료집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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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씨알사상연구소 박제순의 과잉된 ‘안창호 숭배’일찍이 흥사단과 좌파 인물들에 의해 윤치호에 가한 프레임은 ‘친일파’로 금기와 제한을 강요당했다. "친일파는 어떤 것도 허용될 수 없다”거나 "애국가 작사자도 될 수 없다.”는 등이 그렇다. 이는 지나칠 대로 지나친 상태이다. 이 과잉의 진영논리에 가담한 이가 두 번째 비판 대상인 박재순이란 인물이다. ‘씨알사상연구소’ 소장이란 직함을 가진자로 유튜브 등을 통해 안창호설을 유포하고 있다. 이번 글 ‘도산안창호는 어떻게 애국가를 지었는가’의 필자이다.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가 주최하는 도산안창호포럼 2021년 09월 30일 발표한 결과물로 도산안창호포럼 제3집 단행본 ‘애국가 작사와 도산안창호’ 두 번째 게재 글이다. 이 글의 논지는 애국가를 안창호의 철학과 사상에 대입하면 안창호가 작사자라는 결론이다. 말로는 문헌자료와 증언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극복하기 위하여 현대문헌비평학의 방법으로 작사자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고는 하였으나 가사 4절의 주관적 해설로 결론을 내린 정도의 글이다. 논증 없이 억지 주장과 왜곡으로 읽기가 힘들 정도의 동어반복 구문이다. 하여튼 문면상에서는 나름대로 연구를 하였다고 하였으니 따라가 보기로 한다. 첫 문장은 이렇다. #1 "나는 도산 안창호의 정신과 철학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도산이 애국가를 지었다는 확신을 얻고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었다.”(24쪽) 사료 비판과 교차 검증, 그리고 선행연구와의 대비라는 기본 과정이 아니라 특정 인물의 정신과 철학에서 논쟁적 사안의 결론을 찾고자 한다니 자폐적 연구임을 자인한 것이다. ‘확신’은 연구 과정의 개인 감정이지 결과는 아니다. 연구의 결론은 확신 단계 그 이상의 사실 입증에 의한 진실 추구여야 한다. 이런 ‘확신’은 대개 확증편향일 수 있고, 어쩌면 흥사단의 주문 생산 아니면 진영논리에 의해 꿰어맞춘 글이기 십상이다. 다음과 같은 진단 자체도 모순이다. 윤치호 작사 사실은 간명하고 정연한데 반해, 안찬호설은 혼란스럽고 뒤얽힌 것인 데도 이를 뭉뚱그려 말했기 때문이다. 윤치호 작사 사실은 ‘찬미가’와 ‘자필 가사지’의 존재, 일제 감찰 기록과 각종 신문잡지의 기록, 그리고 가족과 동시대 지인들의 증언이 축차적이고 상호보완적이어서 뒤얽히지도 않고 혼란스럽지도 않다. 그래서 이런 문제 제기는 잘못된 것이다. #2 "안창호와 윤치호의 애국가 작사설에 관한 혼란스럽고 뒤얽힌 증언들과 문헌자료들을 바로 이해하고 극복해야 한다. 증언들은 안창호 작사설에 유리하고 문헌자료들은 윤치호 작서설에 유리하게 보인다. 문헌자료들을 중시하는 역사학자들과 일반 국민들의 관점에서 보면 윤치호 작서설이 유리하게 보이기도 했다. 이런 문헌자료들과 증언들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대문헌 비평학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거듭 밝히지만 안창호설은 내세울 증거 자체가 없음은 물론, 증언 정도도 상호 모순 관계에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단적인 예로 가장 중요한 흥사단 역사 서술에서나 흥사단 노래 자료류에서 ‘애국가 안창호 작사’라는 기록은 찾을 수 없을뿐더러 해방 전까지의 많은 행사 기록에서 현 애국가 보다 ‘무궁화노래’가 주로 불렸다는 사실이 입증한다. 그런데 안창호설에서는 일종의 패턴이 확인된다. 그것은 작사설이 축적되는 과정에 순흥안씨(純興安氏)가 중심에 있다는 사실이다. 구체적으로는 안익태→ 안춘근→ 안흥권→ 안민석→ 안용환에 이르는 흐름에서 가짜 사료 발표, 개작 주장, 합작설 생산, 그리고 조작 유도 등이 자행되어 왔다는 점이다. 또한 가지는 지인들의 증언과 주장에 번복과 유도성 증언을 생산했다는 사실이다. 주요한과 구익균 같은 이의 사례들이 그렇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상과 같은 현상이 주로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 작사자 조사 이후 자행되어 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반해 윤치호 작사 사실과 관련해서는 자연스런 자료 발굴 등으로 위와 같은 사례는 없다. 굳이 윤치호의 경우를 말한다면, 직접 기록 외에 1910년대부터 1940년대 말까지의 일제 탄압 기록과 국내외 신문 잡지 기사와 일본 유학생 자료, 특히 가족과 지인들의 증언이 동일방향을 갖는다. 특히 주목하는 것은 가족들의 주장이다. 사실이라면 가장 가까운 가족들이 모를리가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1952년 미국에서 발행된 한국 주변 국가의 애국가(국가)를 수록한 E. R Griffith 편저 ‘National Anthems’에 윤치호 2녀 보희씨가 작사자는 윤치호라는 사실을 상술한 예와 ‘자필 가사지’ 등의 증거를 제시한 윤치호의 서랑(壻郞) 정광현 교수 같은 사례를 말한다. 이에 비해 안창호의 경우는 딸과 손주에 의해 2000년대 들어 떠밀려서 하는 듯한 방송 인터뷰가 있을 정도이다.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에 수록된 증언들에서도 같은 현상이다. 윤치호 작사 사실에 대한 부분에 비교하면 안창호 설의 증언은 극히 소략한 정도이다. 그것도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도산 안창호’ 관련 부분에 대한 이광수 부인 허영숙의 증언도 윤치호 가족의 주장과 대치(代置)되에 가치를 발휘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3 "나는 현대문헌비평학의 관점에서 윤치호 작사설의 증언들과 문헌자료들을 합리적으로 의심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한 결과 윤치호 애국가 작사설은 근거가 없음을 확인하고 윤치호는 애국가 작사자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적어도 이 글에서 현대문헌비평학의 관점이니 하지만 박재순이 내린 결론은 "작사자는 윤치호가 아닌 안창호”라는 한 마디다. 그런데 여기에는 큰 함의가 있다. 작사자를 확정하는 것은 증거와 증언의 합리적 분석에 의해서인데, 이 글은 굳이 윤치호의 성향을 앞에 깔고 안창호의 사상(?)을 내세우는 방식이다. 이는 사상 검증의 사감(私感)으로 결론을 내리고 합리적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과 다름없다. 답하기 바란다. 합리적으로 검토한 윤치호와 안창호의 관련 ‘문헌자료’와 ‘증언’은 어떤 것인가? 이 물음에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윤치호의 문헌자료와 증언뿐일 것이나 이마저도 제시하지 않았다. 이런 글은 ‘검토’ 수준도 미치지 못하는 개인적인 소감(所感) 정도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윤치호 작사 사실은 이미 필자에 의해 문헌과 증언으로 결론을 내린 상태임으로 감당할 수 없어 거론하지 못했을 것이다. 과연 이런 상황인데 글을 어떻게 끌고 갈까? 당연히 기존 안창호설 주장자들의 기본 레파토리를 내세우고 있다. 바로 -이승만, 친일파 사학자, 국사편찬위원회가 안창호에게서 애국가 작사자 지위를 빼앗았다-라는 대목에서 직감할 수 있다. #4 "나는 그 당시의 조사과정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이승만과 친일파 지식인 이병도 백낙준 서정주 윤치영 등이 국사편찬위원회를 앞세워 안창호에게서 애국가 작사자 지위를 빼앗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국학의 대가 최남선, 서지학의 권위자 황의돈, 안창호와 함께 상해에서 일했던 주요한 등이 안창호 작사설을 주장했으나 이승만의 지침에 따라 이병도와 국사편찬위원회가 백낙준 서정주 등과 함께 안창호 작사설을 페기하는데 주력했다. 본래 문교부는 안창호를 애국가 작사자로 미국대사관에 통보하려 했다.”(29쪽) ‘면밀한 검토’ 대상인 증거나 증언, 그리고 교차 검증 등의 과정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신만의 주장을 과시하고 있다. 이승만과 친일파들이 국사편찬위원회를 앞세워 안창호의 작사자 지위를 ‘빼앗았다’ 또는 ‘폐기’하였다고 왜곡한 것이다. 이 말에는 어느 시점 이전, 즉 1955년 4월 13일 국사편찬위원회의 ‘애국가 작사자조사위원회’ 구성 이전까지는 안창호가 작사자였다는 주장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박재순이 이를 사실로 믿었거나 누군가에게 믿게 하려는 술수라고 본다. 전자든 후자든 문제인데, 후자인 듯하다. 왜냐하면 마지막 문장에서 문교부가 미대사관에 안창호가 작사자라고 통보하려 했다는 기록을 인용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배경을 상술하여 진의 파악해 보기로 한다. 1955년 4월초 공보처는 미국대사관으로부터 "귀국의 국가 작사자를 국내 백과사전 편집부에서 요청해 온 바 이의 필요상 문의합니다”라는 전문을 받는다. 이를 이첩 받은 문교부는 안창호 작사 안익태 작곡으로 통보할 것을 준비하였다. 이 상황은 정부 기관지 서울신문 4월 4일자 ‘우리나라의 애국가 美 백과사전에 삽입’이라는 제하에 보도를 하였다. "주한 미대사관에서는 우리나라 애국가를 美 백과사전에 삽입하여 세계에 널리 소개하고자 2일 문교부 당국에 애국가 연혁을 밝혀 회보하여 줄 것을 요청하여 왔다. 그런데 문교부에서는 도산안창호 선생이 애국가를 작사한 연월일과 방금 귀국 중에 있는 안익태씨가 당시에 작곡한 사실 등을 회보할 것이라 한다.” 이 기사가 애국가 작사자 논란의 발화점이 된다. 이 기사는 ‘~그런데 문교부에서는~’이란 주저함에서 알 수 있듯이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도산안창호 선생이 애국가를 작사한 연월일’이라고 하였지만 애국가 역사에서 윤치호의 ‘자필 가사지 1907년작’이란 기년(紀年) 적시 외에 월일을 내 세울만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기사는 팩트 체크를 하지 못한 명백한 오보이다. 그렇다면 이 문교부의 실책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 이 시기 근거로 삼을 만한 공식적인 정부 기록은 없다. 다만 두 가지 사적(私的) 기록이 있을 뿐인데, 하나는 1947년 5월 발행된 이광수의 전기소설 ‘도산안창호’ 애국가 관련 기록이고, 또 하나는 동아일보 1948년 10월 6~8일자 음악평론가 박은용(朴殷用)의‘愛國歌考’이다. 이 기사를 통해 문교부의 오류가 두 자료에서 편의적으로 선택된 결과임을 알 수가 있다. ‘애국가고’를 통해 사안을 확인해 본다. 박은용의 글 첫 회에서는 ‘도산안창호’의 애국가 관련 기록을 전제했다. ‘도산안창호’의 내용 일부이다. "원래 이 노래는 도산의 작이거니와 이 노래가 널리 불려져서 국가를 대신하게 됨에 도산은 그것을 자기 작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다. 애국가는 선생이 지으셨다는데 하고 물으면 도산은 대답이 없었다”란 기록이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윤치호 작사 증거인 ‘1907年 尹致昊作 자필 가사지’와 서정주의 이승만 전언(傳言) ‘기자협회보’ 기사, 그리고 1908년 윤치호 역술 ‘찬미가’ 등을 제시하였다. 이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故 윤치호씨가 현재 아무리 불미한 입장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애국가를 작사한 사실까지를 무시하고 거짓으로 도산선생 작품을 만들 필요는 없다. 만인이 애창하는 준엄한 애국가라는 점에서 더욱 그런 것이다.” 이렇게 1955년 이전에 작사자 문제를 거론한 기록은 이 두 가지 정도이다. 이 기사 7년이 지난 뒤에 ‘~그런데 문교부에서는~’이라며 안창호설을 대두 시킨 것이다. 이렇게 보는 데는 1948년 9월 제헌국회에서 애국가에 대해 논의를 할 때도 작사자 문제는 없었다는 사실에서 이다. 그러므로 문교부가 미국 대사관에 통보하려한 내용에는 안창호가 언제, 어떤 배경으로 작사를 했다는 등의 내용 적시가 아니라 전기소설 ‘도산안창호’의 애국가 언급 정도일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에서 박재순의 #4에서 안창호의 작사자 지위를 빼앗았다는 주장은 오판을 넘어 왜곡이 된다. 이런 결과는 다음과 같은 친일 프레임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다. 지금이나 그때나 ‘친일’은 용납될 수 없는 사상 문제로 이를 거론하는 순간 확증편항적 결과가 나오게 된다. 국사편찬위원회를 앞세워 작사자 지위를 빼앗은 "친일파 지식인 이병도 백낙준 서정주 윤치영”을 나열하고, 이어 "국학의 대가 최남선 서지학자 황의돈 안창호와 함께 상해에서 일했던 주요한 등이 안창호 작사설을 주장”했다고 하였다. 여기서 최남선을 ‘국학의 대가’라고 추켜세웠고, 흥사단 단우 주요한을 안창호 작사 주장자라고 하였다. 친일파로 치자면 누구 못지 않은 최남선을 예우한 것도 별나지만 증언을 번복한 주요한까지 포함하여 안창호 작사 주장자라고 제시한 것은 의외이다. 사실 최남선은 안창호설을 지지하지 않았다. 단지 윤치호 측이 제출한 매우 흐리게 현상된 ‘자필 가사지’ 사진을 접하고 문제를 제기하며 "1907 윤치호 작이 진(眞)이라면 윤씨작이라 하여도 무방(無妨)할 것이다”라고 했던 것이다. 주요한은 1955년 4월19일자 경향신문 기고 ‘애국가 작사자는 누구?’에서 "안창호의 애국가 작사 주장은 하나의 신화”라고 못박았다가 1963년 ‘안도산전서(安島山全書)’에서 이를 번복한 바가 있다. 황의돈(黃義敦)은 윤치호 교장 시기 대성학교 교사로‘친필 가사지’ 원본이 제출되자 침을 묻혀 먹물이 묻어나자 오래 되지 않은 것이라고 의견을 제시했다 1945년에 쓴 것임을 알고 수긍한 인물이다. 1년 동안 3차에 걸친 조사위원회 발 기사를 주목하면 이들은 모두 최종적으로 윤치호 작사를 인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인데 이들을 친일파 대(對) 안창호설 주장자로 나눠 거론한 방식 자체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조사 과정 초기에 관심을 끌었던 안창호설은 2차 회의 부터는 거론되지 않았고, 애국가작사자조사위원회 3차 최종회의 결과는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이다”였다. 다만 이를 확정 발표하는 것에 대해 거수 표결 결과 2인이 "만일의 경우 거부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를 제시하고 타 작사자가 출현하는 일이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가정”하여 윤치호로 발표하는 것을 유보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이를 문교부에 보고하였다. 약 30여차에 이르는 당시 보도를 순차화하고 맥락화하면 오류나 개인 감정이 개입될 여지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중반부터의 보도 경향은 윤치호에 대한 증거자료가 국내외에서 답지하여 이를 다룬 기사가 주였고, ‘자필 가사지’에 대한 필적 감정까지 과학수사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이러함에서 친일파 운운하여 ‘지위를 빼앗았다’거나 ‘폐기’하였다는 주장은 왜곡인 것이다. #5 "-도산은 애국가를 어떻게 지었나?-윤치호가 지은 무궁화가가 애국가로서 널리 불리워졌다. 무궁화가는 황실찬미가였음으로 민을 새롭게 일깨우는 신민회의 교육운동에 적합하지 않았다. 안창호는 무궁화가를 대체하는 새로운 애국가를 지어야 했다. 안창호는 무궁화가의 후렴을 그대로 가져왔을 뿐 아니라 무궁화가 1-4절과 글자 수가 일치하는 애국가 1-4절을 지었다. 안창호와 신민회가 윤치호와 독립협회를 계승하듯이 애국가는 무궁화가를 계승하였다.” ‘무궁화가’를 윤치호 작으로 인정한 것은 다행이다. 사실 필자가 ‘독립신문’ 영문판에서 서재필이 "계관시인 유치호가 지었다”는 기록을 찾아 발표하기 전까지는 필자 외에는 이를 윤치호 작사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를 기껏 찾아 정위 시켜 놓으니 이제는 이를 윤치호에 맥락화 하지 않고 엉뚱하게 안창호에 연결시키는 이들이 있는데 신용하이며 박재순이다. 사실을 맥락화 하지 못하고 안창호 작으로 변신시키는 일을 하는 이들로 안창호가 신민회에 적합하게 대체하였다는 주장이다. 그 실장이 지금 자행 되고 있는 것이다. 하여튼 박재순의 이 대목은 안창호는 윤치호와 황실찬미가인 ‘무궁화가’가 없었다면 애국가를 지을 수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안창호가 애국가를 지은 이유이고 과정이라고 보는 것인데,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안창호와 신민회가 윤치호와 독립협회를 계승하였듯이 애국가는 ‘무궁화가’를 계승하였다.”고 했다. 이 논리에 -윤치호는 애국가를 어떻게 지었나?-라는 물음을 윤치호로 대입한다면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작사 과정과 동기 등이 맥락적임을 알 수 있다. 윤치호는 1897년 8월 대조선개국 505주년을 기념하여 ‘찬미가 제10장’(‘무궁화가’)을 지었고, 1897년 10월 대한제국 선포를 기념하여 ‘찬미가 제1장’을 지었고, 1907년 한영서원 개교를 기념하여 ‘찬미가 제14장’을 작사하였다. 이와 함께 번역 찬송가 12편을 포함하여 1908년 재판 ‘찬미가’를 발간하여 염가(廉價) 보급함으로서 제14장 애국가는 한영서원은 물론 호수돈여학교 같은 인근의 기독교계 학교로부터 널리 확산이 되었다. 이상을 이해한다면 더 이상의 논란을 벌일 이유가 없다. 이에 대해 귀를 기울이지 않고 진영 논리에 함몰되어 오류를 되풀이하고 있다. 이어지는 글에서도 매우 기묘한 논리를 전개하였는데, 유길준과 ‘독립경절회창가’를 끌어들였다. 임중빈의 안창호 전기 기록과 졸저 ‘애국가 작사자 연구’에서 착안한 듯한데, 안창호가 1907년 귀국 중 일본에서 만난 유길준에게 애국가의 작사를 요청하였다는 기록을 과도하게 해석한 결과이다. 박재순은 임중빈의 기록을 수용하여 자기식으로 재편하였다. 먼저 임중빈의 기록을 인용하고 박재순의 기술을 대비하여 본다. "도산은 유길준을 만나 자리에서 간청해 보았다. -우리나라에 국기는 있어도 아직 국가가 없으니, 선생님께서 지어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책은 좀 썼어도 노래를 지을 재능이 없소. 끝내 사양하였다.” 전후 맥락에서 안창호의 작사 요청이 담고 있는 진의(眞意)나 결과는 이렇다. 즉, 안창호는 귀국하며 미국처럼 국기와 애국가의 효용성을 국내 교육현장에서 실현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유길준 등을 만나고 귀국해 보니 관립기관과 기독교계에서는 이미 애국가를 부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애국가 작사가 아니라 그 보급에 힘을 쓰게 되었는 사실이다.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때문에 임중빈도 "작사자는 윤치호이나 널리 보급한 이는 안창호이다”라고 단언한 소이(所以)이다. 그런데 이를 박재순은 오독을 하였다. 다음, 유길준의 응답에 대한 문제다. 1895년에 ‘서유견문’ 집술과 ‘조선문전’을 저술했으니 책은 썼다고 한 말은 사실이다. 이어 노래를 지을 재능이 없어 거부했다고 했으니, 이 또한 사실로 받아들일 수가 있다. 그래서 박재순은 이 거부 사유를 빼버렸다. 바로 유길준이 12년 전에 ‘독립경절회창가’를 짖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 여지를 숨기기 위해서이다. 박재순이 끌어 온 ‘독립경절회창가’는 1895년 5월 8일 청일전쟁의 승리로 맺어진 시모노세키조약 결과에 의해 조선이 중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된 것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탄생하였다. ‘왕조실록’과 ‘속음청사’ 6월 14일자에는 간단하게 기록되었으나 18일자 일본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에는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었고, 이 창가도 전 8절 가사를 수록하고 작사자를 유길준이라고 하였다. 이 노래를 박재순은 어떻게 활용하였는지를 보기로 한다. 왜곡을 하였다. "안창호가 도쿄에서 유길준을 만나 애국가를 지어달라고 부탁했을 때 유길준은 애국가 짓는 것을 사양했지만 독립경절가에 대해 이야기해주었을 것이다.”(36쪽) ‘독립경절회창가’를 안창호와 연결한 것은 대단한 상상력 발휘 결과이다. 윤치호의 허다한 문헌 증거와 증언 들을 무시하고 사실 여부가 입증되지 않는 한 줄의 문장을 단서로 안창호 작사로 전복(顚覆)시키려는 야심을 담았으니 가능하다. 바로 안창호가 유길준의 ‘독립경절회창가’에서 영향을 받아 애국가를 작사했다고 한 것이다. 연구 자세의 엄정성보다는 진영논리에 함몰된 만용이다. 이렇게 막 나가는 형편이다. #6 "–유길준의 독립경절가, 흥사단-‘독립경절가와 애국가를 비교해보고 안창호와 유길준의 특별한 관계를 고려하면 애국가 작사자는 안창호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나는 이것이 안창호 애국가 작사설을 증명하는 가장 중요한 역사 문헌적 증거라고 생각한다. 1895년 조선정부의 독립선고식에서 부른 유길준의 독립경절가는 안창호가 애국가를 작사하는데 큰 자극과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독립경절가는 황재와 조선국가를 찬양하는 노래이지만 6~8절은 현행 애국가의 내용과 사상이 일치한다.” 일본에서 만나 작사를 요청한 사실과 ‘흥사단’이란 단체명을 벤치마킹한 것을 ‘특별한 관계’라고 한듯하다. 그런데 유길준이 1914년에 사망하였으니 안창호와의 교분은 특별할 수가 없다. 그러나 윤치호와 유길준은 부친 윤응렬로부터는 물론이고 1881년 일본 유학 동기로서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협회(1897~1898)운영과 1910년까지 많은 계몽 단체의 조직과 운영에 함께한 사이이다. 더욱이 독립경절 원유회를 함께 주관한 관계는 주목이 된다. 그렇다면 이런 ‘특별한 관계’로 윤치호를 꼽을 수는 없는가? 그리하여 같은 논리로 유길준의 독립경절회창가는 윤치호가 ‘찬미가 14장’을 작사하는데 자극과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은 불가능한가? 그러나 안창호이든 윤치호이든 이런 가설은 성립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윤치호는 이미 유길준에 못지 않은 동서양 문물을 체험하여 국가적 기념일에 기념가를 지어 축하하는 풍조를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저술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창호는 1907년 이전에 저술은 물론 노래를 지은 바가 없는데다 전통 율조의 가사체는 인식에 있었어도 후렴이 있는 서양식 시가는 인식이 부족했을 것이다. 첫 노래 ‘거국가’가 그 증거이다. 그래서 박재순은 독립경절회창가‘의 배경을 이해 못하고 현 애국가에 연결시켰다. 거기다 "애국가의 내용과 사상이 일치”한다고 이해한 6~8절만을 논거로 삼았다. 그런데 이 대목은 유길준만의 것이 아니다. 소위 상호텍스트성의 관계일 뿐이다. "6 장백산 높다해도 비교해 보라, 우리국민의 기염을, 도리어 낮구나. 저 산도 7 동해물 깊다해도, 비교해 보라, 우리국민의 진심을, 도리어 앝구나, 저 물도 8 이 기염, 이 진심, 두 개를 합치면 강한 힘, 저 힘을 가지고 우리 임금을 지키세.”(37쪽) 박재순은 이 3절의 용어, 내용, 정신이 유길준의 것으로 현 애국가 1~3절과 일치한다며 이를 안창호가 영향을 받았다고 하였다. 사실 8절 전체를 보면 내용과 정신은 애국가와 연결 시킬 수가 없는 내용이다. 행사 자체가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중국으로부터 빼앗았음을 중국과 조선에 경고하는 행사이고, 이에 따른 기념가이기 때문이다. 이를 간과한 박재순은 애국가 가사를 모독한 것이기도 하다. 나머지 ‘용어’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이 자료가 지상에 공개되자 노동은 교수 같은 윤치호 작사 부정론자들은 윤치호가 이를 표절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때도 필자는 같은 논리로 반박한 바 있는데, 즉 전통 시가작법에 용사(用事)가 있다. 한시를 지을 때 전고(典故)나 사실을 인용하는 시작법으로 경서(經書)나 사서(史書) 또는 여러 사람의 시문에서 특징적인 관념이나 사적(事迹)을 몇 개의 어휘에 집약시켜 시의(詩意)를 배가시키는 방법이다. 이는 시론에서는 상호텍스트성으로, 민요론에서는 공식어구(formula)로 말하기도 한다. 실례를 들기로 한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은 당연히 시계열상으로 살펴야 한다. ① ‘자차통감’과 ‘통감절요’의 서약문 "황하의 강물이 말라서 띠같이 가늘어지도록, 태산이 닳아서 숫돌같이/ 작아지도록, 봉해주 신 나라 영원하소서” ② 남이장군(南怡將軍1443년~1468)의 ‘북정가(北征歌)’ "백두산 높은 봉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 두만강 깊은 물은 말을 먹여 다 없애리라” ③ 유길준(1895)의 ‘독립기념경절회창가’ "장백산 높다해도 비교해 보라, 우리국민의 기염을, 도리어 낮구나/ 장백산 높다해도 비교해 보라, 우리국민의 기염을, 도리어 낮구나. ④ 윤치호(1907) ‘찬미가 14장(현 애국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유하사 우리나라 만세” 이상을 통해 박재순이 말한 ‘용어’와 그 표현의 문제는 ‘독립경절회창가’가 기준이 아니라 더 이른 시기, 더 많은 작품들이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함에서 유길준과 ‘독립경절회창가’가 없더라도 이런 용어와 표현은 가능한 것이고, 애국가는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이 된다. 작사자를 윤치호로 보든 안창호로 보든, 이런 방식은 논증이 아닌 상식의 영역이다. 이런 관점에서 ‘마르고 닳도록’이란 영원성을 표현한 것은 곧 ‘하나님이 보우하사’를 수식하여 기원의 간절함을 강화시켜 준 것이다. 결국 "안창호와 유길준의 정신 사상적 일치를 감안하면 안창호가 애국가를 지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한 단언은 본질을 놓치고 쌓은 모래성일 뿐인 것이다. 이제 박재순의 글에 대한 반론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애국가에 담긴 도산의 생각’, ‘애국가에 담긴 안창호의 사상과 정신’, ‘애국가에 담긴 안창호의 정신과 삶’이란 3개 항목에 대한 비판은 생략하기로 한다. 앞에서 살폈듯이 잘 못 된 논증으로 설정한 ‘안창호 애국가 작사’는 사상누각(沙上樓閣)이기에, 이를 대상으로 비판하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도산안창호는 어떻게 애국가를 지었는가’의 마지막 네 문장은 주목하여 거론하고자 한다. 이를 졸고의 결론으로 삼고자 한다. 주목하는 네 문장은 이것이다. #7 "애국가는 안창호의 기도이고 노래이고 정신이고 철학이었다. 애국가는 그의 삶과 정신을 이끄는 깃발이고 지침이고 철학이었다. 애국가는 그의 삶과 정신을 이끄는 깃발이고 지침이고 고백이고 선언이었다. 그는 애국가를 살았고 애국가는 그를 살리고 지키고 이끌었다.” 안창호에 대한 과한 수식이다. 그런데 아무리 수식이라고 하지만 그냥 넘길 수가 없다. 바로 ‘기도’ 때문이다. 기도의 대상은 당연히 ‘하나님’이다. 안창호는 1895년 미국 북장로회 계통 선교사 H. G. 언더우드가 설립한 구세학당(救世學堂)에 입학하였으니 기독교인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안창호는 하나님을 성호(聖號) 하며 신앙고백을 한 바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엄연한 사실에 의해 결론은 내리면 이렇다. "애국가는 안창호의 기도일 수 없다. ‘하나님’이라는 성호를 가사에 썼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창호는 명백하게 애국가의 작사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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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농경&어업문화의 전통지식 &기술 집대성한 보고서 발간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은 생활 속에서 전해져오는 무형유산을 조사하고 심층 연구해 ‘무형유산 조사연구’ 보고서를 시리즈로 발간하고 있으며, 최근 전통 관개지식과 덕장 건조기술 연구를 집대성한 보고서를 발간했다. 이번에 발간한 '전통 관개지식과 수리문화'와 '덕장과 건조기술'은 국립무형유산원이 2017년도부터 2020년까지 4년간에 걸친 현장조사로 수집한 다양한 자료들과 이후의 심화연구를 거쳐 완성한 결과물로, 농경·어로분야에서 다양한 공동체가 전승해 온 전통지식과 문화적 관습 등이 지역의 생업 현장을 유지하는 데 기반이 되어 왔으며, 나아가 지역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보여주는 산물이다.농사에 필요한 물을 대면서 공동체가 축적한 ‘관개지식’과 그 과정에서 형성해 온 ‘수리문화’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보고서이다. 전통 관개지식과 수리공동체의 특징부터 보·저수지·소규모 저수시설·저수답·간척논 등 여러 현장에서 전승되어오고 있는 관개문화의 무형유산적 의미를 담았으며, 논에 물을 대기 위해서는 지형, 기후, 시설에 대한 전승지식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사회조직, 의례 등의 유·무형 유산이 상호 융합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덕장과 건조기술은 오랫동안 주요한 식재료로 자리잡아온 건어물이 다양한 자연환경, 사회문화적 배경, 건조지식 등을 활용해 지역 특산물이 되어가는 과정을 연구한 보고서이다. 어물 건조의 역사부터 강원도의 황태와 북어덕장, 동해안의 과메기와 건오징어덕장, 서해안의 굴비덕장, 남해안의 대구덕장 등 각 지역 덕장의 대표 건조기술과 전승주체의 특징, 그 가치 등을 수록하였다. 황태, 과메기, 굴비 등 지역을 대표하는 이들 건어물은 지형, 바람, 온습도 등 자연에 대한 전통지식과 다양한 형태의 전승주체를 통해 생산되어 왔음을 보여준다.보고서는 국립무형유산원 무형유산 디지털 아카이브 누리집(www.iha.go.kr)에서 열람할 수 있다.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은 "이번 농경과 어로 관련 무형유산 연구 보고서에 이어서 앞으로는 민간신앙 관련 사회적 의식, 전통적 놀이 등에 대한 연구결과 보고서를 발간할 예정이며, 앞으로도 공동체가 생활 속에서 전승해온 다양한 무형유산의 가치를 연구하고 그 결과를 지속적으로 국민과 공유하여 널리 알리고자 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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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Ⅳ 찬미가 ‘Patriotic Hymn’의 전승 과정현 애국가의 출현은 1908년 6월에 발행된 윤치호 역술 '찬미가' 재판에 수록됨으로서 이다. 제15쪽 ‘Patriotic Hymn(Auld Lang Syne) 뎨十四’이다. 그런데 이 책이 재판(再版)임으로 초판 발행은 한영서원을 개교한 1906년 10월 전후로 본다. 그런데 윤치호가 1945년 작고 직전 자필로 남기 가사지에 ‘1907년 작’이라고 밝혔기 때문에 이 초판에는 현 애국가가 수록되지 않았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작사 시점도 1907년부터 1908년 6월 어간이라고 보게 된다. 이렇게 출현한 ‘찬미가’ 제14장 현 애국가는 또 하나의 애국가에서 대표적인 애국가로 확정되기에 이른다. 이 과정을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1) 1908년 재판 찬미가 제14장 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대한 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히 보전하세 二. 남산우헤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이슬 불변함은 우리 긔상일세 三. 가을하날 공활한대 구름업시 놉고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四. 이 긔상과 이 마 음으로 님군을 섬기며 괴로오나 질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애국가 가사 4절의 면모이다. 당시 기독교인들에게나 일반인들에게도 국가 안녕과 독립에 대한 기도문으로 통하여 자연스럽게 연계, 수용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무궁화 노래’와 일정 기간 까지는 길항(拮抗) 관계로 불리다가 3.1운동기를 계기로 대표적인 애국가가 되었다. 2) 1910년 9월 미주 신한민보 ‘국민가’ 一. 동물과 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ᄂᆞ님이 보호ᄒᆞ샤 우리 대한 만세 (후렴) 무궁화 삼쳔리 화려강산 /대한사ᄅᆞᆷ 대한으로 길히 보전ᄒᆞ세 二. 남산우헤 뎌 소나무 철갑을 둘은 듯 /바ᄅᆞᆷ이슬 불변ᄒᆞᆷ은 우리 긔샹일세 三. 가을하ᄂᆞᆯ 공활ᄒᆞᆫ데 구름업시 놉고 /발근 달은 우리 가ᄉᆞᆷ 일편단심일세 四. 이 긔샹과 이 맘으로 민족을 모흐며 /괴로오나 즐거우나 나라사ᄅᆞᆼ하세 미주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기관지 ‘신한민보’ 제1면에 ‘국민가’라는 곡명으로 게재된 전4절 가사다. 주목되는 것은 ‘윤티호 작가’라고 밝혔다는 사실이다. 이는 애국가 자료를 게재한 매체에서는 보기 드문 현상인데, 작품 자체를 소개하는 목적이기 때문에 제1면에 가사 전4절과 함께 작사자를 밝힌 것이다. 매우 의미 있는 전승기록이다. 찬미가 제14장과 다른 점은 ‘아래 아’ 표기를 했다는 점과 4절 ‘님군을 섬기며’가 ‘민족을 모흐며’로 변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제14장을 텍스트로 하지 않고, 구술에 의한 것으로 보게 한다. 특히 눈에 띠는 것은 곡명이 ‘국민가’로 변이 된 점이다. 이는 ‘국민회의 회가(會歌)’로 기능을 부여하기 위해 고쳤다고 보게 된다. 더불어 제4절 ‘님군을 섬기며’도 국권 상실로 임금이 없음으로 ‘민족을 모으며’로 수정한 것으로 보게 된다. 3) 1912년 간도 용정촌 애국가 간도 용정촌 국자가(龍井村 局子街) 한인의 소지품을 일본총영사관이 압수, 보고한 자료에 들어있는 애국가이다. 이 창가집에는 소년보국가·운동가·한반도가·대한혼가·부모은덕가·학도가·혈성대가·영웅모범가·조국생각과 함께 애국가가 들어있다. 일본어로 번역하여 보고한 애국가는 후렴구 1절 마지막 구절이 ‘우리민족 만세’로, 마지막 구절이 ‘길이 광복하세’로 되어 있다. 후렴구 일부를 변이시킨 것은 의외이다. 4) 1914년 「태평양잡지」 애국가 이승만(1875~1965)이 1913년 9월 하와이에서 창간한 월간 「태평양잡지」 1914년 4월호에 ‘애국가와 찬미가’라는 기사에 수록된 자료이다. 2000년대 들어 국내에 입수되어 확인 되었다. 애국가 작사자를 윤치호라고 밝힌 자료이다. 「찬미가」를 언급하면서 "무궁화 곡조에 다른 말로 만든 것”이 애국가라고 하였다. 특히 애국가의 탄압 실상을 밝히고 있는데, "찬미가는 본국에서 압수하고 매매를 금지한 책인데 한 권을 우리가 얻었기로 대강 뽑아서 등재하며 우리나라 사람들이 차차 노래를 애국제도로 모본하여서” 국내에서 찬미가를 압수하고, 애국가를 금지했음을 전했다. 이 시기 윤치호는 ‘105인 사건’으로 대구형무소에 투옥(1913~1915)돼 있었다. 국내에서는 이를 기사화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면서 국내에서는 조선총독부가 불온서적으로 낙인찍어 소유자들이 스스로 폐기, 희귀해졌다는 사정도 알려 주었다. 5) 1915년 간도 광성중학 교재 수록 애국가 중국 간도 소영자(小營子)의 광성중학교(光成中學校)에서 1914년 간행한 「최신창가집」을 일제가 입수하여 보고하였다. 이 책 첫 작품이 ‘國歌’라는 제목으로 애국가 가사를 싣고 있다. 신한민보의 ‘국민가’와 유사하다. 다른 점은 제1절 ‘하나님이 보호하사’가 ‘한아님이 보우하사’로, ‘우리 대한 만세’를 ‘우리나라 만세’로, 3절의 ‘구름업시 놉고’를 ‘놉고 구름업시’로 변이시켰다. 그런데 "찬미가" 4절의 ‘님군을 섬기며’를 신한민보 ‘국민가’와 같이 ‘민족을 모으며’로 하였다. 이는 주목해 볼 필요가 있는데, 왜냐하면 신한민보 ‘국민가’가 소영자에서 불린 것이 전해진 것일 수도 있고, 반대로 소영자에서 국민가를 수용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6) 1916년 하와이 발행된 「애국창가집」 애국가 표지에는 ‘愛國歌’로 등사되어 있고, 목차 다음에 <애국창가집 서문>이 실려 있다. 판권의 간행일자는 1916년 5월 13일로 되어 있어 1915년 국내 한영서원에서 간행된 "창가집"을 바탕으로 편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가사 1절은 ‘하ᄂᆞ님이 보우ᄒᆞ샤’, ‘우리나라 만셰’로, 3절은 ‘구름업시 높고’로, 4절은 ‘님금을 섬기며’로 되어있다. 7) 1919년 "신한청년" 창간호 소재 애국가 1.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保佑하사 우리나라 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기리 보전하세 2. 남산 우에 저 소나무 鐵甲을 두른 듯 /바람이슬 不變함은 우리 기상일세 3. 가을하늘 空闊한데 높고 구름 없이 /밝은 달은 우리가슴 일편단심일세 4. 이 기상과 이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김규식 중심의 조직인 상해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기관지 "신한청년" 창간호 속표지에 수록된 전 4절 가사이다. 각 절의 변이 상이 확인 된다. 이 가사는 이후 상해임시정부에 계승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큰 기록이다. 이 잡지의 편집자는 주필 이광수이다. 당시 상황으로 보아 안창호의 자문이 반영되었을 것으로 본다. 제14장의 전승에 대해서는 이 기록을 주목하여 정리하기로 한다. ‘신한청년’에 게재된 애국가 가사의 변이는 2절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부 자구가 바뀌었다. 1절의 ‘보호’가 ‘保祐’로, ‘우리 대한 만세’가 ‘우리나라 만세’로, 3절의 ‘구름없이 놉고’가 ‘놉고 구름없이’로, 4절의 ‘님군을 섬기며’가 ‘충성을 다하야’로 바뀐 것이다. 오늘의 애국가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런 변이상 중에 ‘충성을 다하야’라고 바뀐 부분은 예사로 볼 수가 없다. 왜냐하면 두 가지 점에서 그런데, 하나는 이 부분을 상해 임정 초기 안창호가 수정하였다는 주장이 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이 수정이 이미 1910년에 이뤄졌다는 사실 때문이다. 전자에 대해서는 임정시절 안창호와 가장 가까웠던 주요한이 "상해 임정 초기 안창호 선생이 수정하였다”고 주장한 대목이다. 그런데 이미 1910년 미주 신한민보 ‘국민가’에서 ‘충성을 다하야’로 수정되어 나온 다는 사실에서 상호 모순 관계에 있는 것이다. 결국 시기와 지역이 거짓이 되는 것이고, 이 혼란의 주체가 안창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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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10)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사람은 사람을 배반해도 개는 사람(주인)을 배반하지 않는다. 주인에게 충성하는 것은 물론 목숨을 내놓고 주인을 지키는 동물은 개가 유일하지 않을까? 그래서 인간성(人性) 없는 사람을 일컬어 개만도 못하다 했다. 개성(犬性)조차 없다는 뜻이다. 나는 개의 본질을 사랑과 지킴이라고 생각한다. 집안의 개가 문을 지킨다. 터키의 캉갈은 양을 지키는 개다. 심지어 곰이나 늑대, 자칼에게서 양을 지켜내기에 신장이 1미터에 가까울 정도로 크다. 고대 이집트의 개(석상)는 성문을 지킨다. 변형된 개들도 지킴이 역할에는 변함이 없다. 개는 각종 동물과 섞이거나 창조적으로 변형된다. 사자개와 계견(鷄犬, 닭개)과 고마이누(狛犬)도 각기 그들이 지켜야 할 것들, 예컨대 성문과 신격과 온갖 내밀한 사연들을 지킨다. 참고로 일본 신사의 입구를 지키는 고마이누는 고구려에서 일본에 전해진 횡적(橫笛, 혹은 高麗笛)과 이름이 같다. 이누이트족의 개는 달을 지키며 북아메리카 원주민 체로키족의 개는 무려 영혼의 끝을 지킨다. 우리 민화의 개는 심지어 귀신도 잡고 도깨비도 물리친다. 문을 지키니 문배도(門排圖)다. 문배도에 관해서는 지난 호에 소개했으니 오늘은 개에 대해서만 집중한다. 민화에 그려지는 개들은 전형적인 토종개의 모습인 듯한데 목에 검은 방울을 달고 있다. 벽사용 신구, 즉 귀신 잡는 개다. 하지홍씨는 민화 문배도 중 사자개의 모델이 청삽살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많이 보고 널리 들어야하기에 눈이 네 개, 귀가 네 개가 되기도 한다. 19세기의 용호문배도에는 까치와 호랑이를 함께 그리는 호작도(虎鵲圖) 외에 해태 모양의 사자나 개를 그리기도 하고 삼재가 든 해에는 매그림을 대문에 붙이기도 했다. 뒤집어 생각하면 문배도의 개그림은 사실 개가 오줌을 눔으로써 영역을 표시하듯 '우리'라는 영역의 표시, 그래서 안과 밖을 경계 짓는 영토화와 관련되어 있다. 문배도의 개 짖는 소리가 들리는 곳까지가 반려인의 영토이고 위해하는 적들은 물론 갖은 귀신들마저 침범하지 못하는 안전한 영토인 셈이다. 한 동물을 사랑하기 전까지 우리 영혼은 잠들어 있다. 아나톨 프랑스가 한 말이다. 아마 인류가 에덴동산으로부터 추방된 이후 시공을 초월하였던 모든 영성들이 그리고 촉수가 문을 닫아걸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뉴욕 센트럴파크에 세워져 있는 발토의 기념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1925년 겨울, 거친 얼음과 북극의 매서운 바람을 뚫고 네만(Neman)강에서 알래스카 서부의 놈(Nome)까지 1천 킬로미터를 달려 치료제를 전달한 불굴의 개들을 기리며, 그 인내와 충성, 그리고 지혜를 찬양하노라." 전염병 디프테리아가 맹위를 떨치던 동토의 땅 알래스카의 한 도시에 치료제를 전달한 개들을 위한 비문이다. 리처드 토레그로사가 쓴 '개와 고양이에 관한 우습고도 놀라운 진실'(푸른숲)에서 인용했다. 인류를 구한 개들이라고나 할까. 개는 개별 사례에서 민속신앙까지 혹은 병들고 상처받은 마음까지 지켜내는 신장(神將)이요 사천왕이며 게이트키퍼다. 특히 흐트러진 마음, 잃어버린 마음, 상처받은 마음들을 치유하는 등 마음 지키기에 있어서는 반려견 만큼 탁월한 게 없는 듯하다. 그래서일 것이다. 이원영은 '동물을 사랑하면 철학자가 된다'(문학과 지성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개와 고양이와 함께하며 그들을 바라보고 쓰다듬다 보면, 고달픈 세상살이로 뒤틀린 자신의 몸과 마음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단순하게는 즐거운 시간을 갖는 데서부터 정서적 불안이 해소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심장 질환이 호전되기도 한다. 나아가 그들과 삿됨 없이 온 정성을 다해 관계를 맺어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온전한 모습을 회복하는 성스러운 경험을 하게 되기도 한다. 개들이 사기성이 없고 분열적이지 않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 앞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놓아버릴 수 있고, 그 순간 우리에게 시공을 초월하는 한없는 행복을 준다. 그것은 우리에게 영점 조절의 기회가 된다. 맞다. 도대체 인류가 개발해둔 그 어떤 무엇이 차마 지상에서 숨 쉬고 있을 여력이 없는 상처받은 자들에게 아무 조건이나 제약도 없이 소확행의 화평을 가져다줄 수 있단 말인가. 심견도(尋犬圖)를 설계하며 심견도(尋犬圖)를 설계한다. 선불교의 십우도(十牛圖) 즉 심우도(尋牛圖)에서 빌려온다, 선불교에서는 십우도를 소와 목동에 비유한 선의 수행단계로 설계해두었다. 열 개의 그림이니 십우도이고 깊이 성찰하여 찾으니 심우도(尋牛圖)이다. 중국 송나라 때의 보명 십우도와 곽암의 십우도 두 종류가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 주요한 사찰 법당의 벽화로 주로 묘사된다. 십우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중국에는 소 대신에 말을 그린 십마도(十馬圖)가 있고 티베트에는 코끼리가 소재로 등장하는 십상도(十象圖)가 있다. 이에 비유하면 심견도(尋犬圖)는 개를 주인공 삼아 그린 일정한 서사의 그림이라고나 할까. 선불교의 심우도가 깨달음의 내력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지만, 내가 제안하는 심견도는 늘 깨어있을 수 있는 내력을, 나아가 오로지 사랑과 화평의 내력을 도설한 그림일 수 있다. 심견도(尋犬圖)를 설계하는 이유다. 하지만 개의 특성에 따라 그 설계를 달리한다. 깨달음이라기보다 무엇인가에 대한 지극한 염원이라고 해두는 게 낫겠다. 지극한 소망을 다루고 있으니 일명 '천견도(千犬圖)'다. 천 마리의 개를 그린다는 뜻이 아니다. 천개의 개는 천 마리의 개와 다르다. 천년이라는 용어는 일종의 은유다. 천수천안관음을 손바닥의 단 한 개 눈으로 표현하듯, 천년이라는 메타포는 그 아우라가 깊고도 넓다. 내가 제안하는 심견도는 천견도와 같은 말이다. 혼용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이음동의어로 사용한다. 심우도처럼 열 개의 그림을 특정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특별한 어떤 계단을 마련한다든가 무려 수십 개의 계단을 마련할 필요까지는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저 십우도의 예를 따를 뿐이니 그것이 다섯 계단이면 어떻고 두 계단이면 어쩌랴. 다만 상실에서 치유로 아니면 혼란이나 슬픔에서 안정과 평화로 가는 과정을 에둘러 설계할 따름이다. 심견도를 그리는 과정은 선불교의 십우도를 따라 깨달음의 과정으로 이해해도 좋고 예수의 행로를 따라 기독교 구원의 과정으로 이해해도 좋다. 완성된 그림이어도 좋고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 혹은 과정을 뜻해도 좋다. 아니면 자신이 믿는 종교나 신념이나 학설에 따라 과정을 설계해도 무방할 것이다. 학문을 하는 사람에겐 문제를 풀어가는 방법삼아도 좋다. 심리학을 전공하는 사람에게는 마음을 재구성하는 단계로 설정해도 좋다. 평정심을 잃어버린 사람에게는 마음을 지켜내는 과정으로 삼아도 좋다. 아니면 서사 구성의 일반적인 예를 참조해도 좋다. 사건과 행위와 사건들의 연속인 스토리와 재현의 서사담화들이 그것이다. 말을 하지 못하는 반려견과의 교신처럼 무언의 영감이 상호서사(게임서사)로 구성될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리라. 예컨대 국악의 선율과 장단의 서사라면 기, 경, 결, 해의 단계들을 거쳐 오로지 창작되는 선율과 드러나지 않은 리듬으로 교섭할 수 있을 것이다. 혜능선사가 '육조단경'에서 말했던 흔들리는 마음을 '안정'과 '평화'에 이르게 하는 과정이면 족하지 않겠는가. 이 서사의 과정들을 더하면 천견도(千犬圖)가 된다. 반려동물 천만의 시대, 지금 누군가는 심견도를 그리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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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안창호 작사 애국가, “따로 있다”안창호의 글과 구술 자료는 ‘도산안창호전집’ 도산안창호전집, 총 14권, (사)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 발행, 2000에 수록되었다. 이 중에 안창호의 세 가지 필명이 확인된다. 하나는 ‘산옹(山翁)’, 둘은 ‘섬뫼’, 마지막은 ‘애국생(愛國生)’이다. ‘산옹’은 주요한이 창간한 잡지 ‘동광(東光)’ 16호에 발표된 ‘合同과 分離’라는 글로부터 14회를 이은 글에 쓴 필명이다. 구술을 이광수가 윤문하여 발표한 것인데, 일제의 눈을 피해 내용 일부를 빼며("事勢不得이 빼 먹은 곳이 많습니다. 그리 알고 보아 주십시오”) 발표한 것이다. 이 잡지 1926년 11월호에 ‘山翁을 그리면서’라는 글을 통해 분명히 안창호의 필명임을 확인할 수 있다. ‘섬뫼’는 ‘島山’의 우리말 표현이다. 이 쓰임은 역시 ‘동광’ 1926년 6월호 외 세 편의 글에서 쓰인 것이다. 스스로가 썼다고 볼 수도 있고, 편집자가 발표자의 신변 보호를 하기 위해 쓴 것일 수도 있다. 마지막 ‘애국생’은 두 가지 자료에서 확인 된다. 1908년 ‘태극학보(太極學報)’ 3월호(제18호) 소재 ‘讚愛國歌’의 필자로 쓴 것으로, 이것이 안창호의 필명이란 사실은 ‘신한민보 新韓民報’ 1943년 11월 5일자 ‘애국지사의 노래’에서 확인이 되었다. 이 중 살피려는 것은 ‘애국생’이란 필명으로 안창호가 발표한 ‘讚애국가’이다. 그런데 이는 의미상 이미 존재하는 어떤 애국가를 기리는 뜻으로 지은 또 하나의 애국가인 셈이다. 이 작품을 수록한 ‘태극학보’는 1905년 일본 도쿄에 설립된 서북지방 출신 유학생들의 친목단체인 태극학회가 1906년 10월 창간호를 발행한 잡지이다. 처음에는 후배 유학생들의 편익을 도모하고 선후배간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점차 출판을 통한 계몽운동 기관지로 발전하여 국내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윤주(李潤柱), 문일평(文一平) 등의 의연금을 기본자산으로 하고, 회원의 의연금과 학보 판매금, 유지의 찬성금(贊成金)으로 발행하였다. 1907년 7월에는 175명의 인사들이 한꺼번에 의연금을 보내기도 하였다. 편집에는 김낙영·김홍량(金鴻亮)·김지간 등이 관여했다. 배포 지역이 넓었다. 일본, 서울 및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한 국내뿐만 아니라 샌프란시스코의 공립신보사(共立申報社)를 통해 미주에도 배포되었다. 학보는 대개 논단·강단·학원(學園)·문예·잡보·기서(寄書) 등의 항목으로 구성되었다. 논단에는 국내 현실과 애국적인 논설을, 강단과 학원에는 계몽적인 학문의 소개를, 문예에는 문학작품을, 잡보에는 유학생의 활동과 국내외의 정세를 실었다. 국민계몽을 목적으로 한 만큼 계몽적인 학술내용과 애국정신을 고취시키는 논설류도 많았다. 특히 제10호에 이원익(李源益)의 ‘愛國歌’ 등을 수록하여 발행 목적을 실현하였다. 또한 안창호에 대한 활동상을 수록하고 작품을 게재하기도 했다. 바로 ‘찬애국가’가 그 하나이다. 그렇다면 안창호가 이 ‘찬애국가’를 발표하게 한 원래의 애국가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것은 윤치호의 ‘애국적 찬미가 제14장’, 즉 현 애국가로 추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1907년 초 귀국하면서 관심을 보인 것이 국가상징의 하나인 국가(애국가)였다. 그런데 이미 기독교계 학교를 통해 전파된 애국가가 있었던 상태임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함께 교육사업을 하고자 하는 윤치호 작사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윤치호 작사 애국가를 찬하며 자신의 애국하는 노래를 지은 것이다. 찬愛國歌(찬성시 하나님 가히로 同調) 愛國生 이상의 안창호(애국생) 작사 ‘찬애국가’는 두 가지 점에서 의의가 큰 작품이다. 하나는 1908년 2월 이전 기독교계 학교와 교회 등에서 부르고 있는 윤치호 작사 현 애국가의 존재를 안창호가 인정하였다는 사실이다. 둘은 안창호 역시 독립신문이 주도한 ‘애국가 지어 부르기 운동’에 늦게나마 참여하여 새로운 애국가를 지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결과는 의외로 안창호를 "애국가 작사자”로 오인하게 한 것이 된다. 이를 정리하면 이렇다. "안창호의 애국가 작사설의 원천은 1908년 3월 태극학보에 발표한 또 하나의 애국가인 ‘찬애국가’의 존재를 오인한 결과이다. 안창호 작사 애국가는 별개이다. 그러므로 현 애국가의 작사자는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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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인성 전투를 기리는 창작소리극 '처인별곡(處仁別曲)'고려시대 몽골군을 상대로 최초의 승전을 거둔 처인성 전투의 승전을 기리는 '처인별곡(處仁別曲) : 처인성 전투 이야기'가 오는 9월 17일 오후 5시에 용인문화원 마루홀 무대에 오른다. 2023 용인시 지방보조금으로 제작되는 용인민예총 주관으로 개최되는 작품으로 용인 지역의 외세에 대한 저항운동 역사를 모티브를 한 공연이다. 처인성 전투는 제2차 여몽전쟁의 전투 가운데 하나로, 처인부곡(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에서 고려의 승장 김윤후가 살리타를 저격해 사살한 뒤 몽골군을 대파시킨 전투이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군인이 아니라 지역 주민들을 주축으로 몽골군을 상대하여 성공적인 방어전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여몽전쟁의 가장 주요한 전투로, 위대한 승리였음에도 분명하고 저평가된 전투라는 것이 세간의 평가이다. 용인민예총은 이런 배경과 처인성 전투를 모티브로 역사에 기록되지 못했던 부곡민들의 땀 냄새 나는 이야기를 판소리와 택견 등으로 풀어냈다. 용인민예총 안재식 지회장은 "훌륭한 리더, 용감한 백성들, 그리고 위대했던 그 승리 현장으로 용인시민들을 초대한다. 부디 귀한 발걸음으로 함께해주시기를 바란다”고 당부를 전했다. '처인별곡'은 ‘쌈 구경 가자!’, ‘아리랑, 택견과 만나다’ 등을 연출한 박종욱 연출가가 직접 시나리오 각색을 맡았으며, 조연출에 용인민예총 극위원장 박병건이 이름을 올렸다. 작곡으로는 정승원, 작창에는 윤지선, 최반석, 송자연, 김민지가 참여한다. 그리고 탄정 이진혁 작가와 용인민예총 이두성 명예회장이 특별 출연한다. 용인특례시의 후원으로 제작되며, 예매는 네이버 예약을 통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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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대성학교,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지난 회에서 ‘한영서원’과 애국가와 관련 사항을 살펴 윤치호가 애국가의 작사자임을 밝혔다. 이번에는 역시 같은 시기 민족교육 학교인 안창호 설립 대성학교(大成學校)와 애국가 상황을 통해 작사자 문제를 짚어 보기로 한다. 대성학교는 1908년 9월 26일 개교하여 1912년 일제에 의해 폐교된 평양에 세워진 학교이다. 설립자는 안창호(安昌浩)이다. 평양의 김진후(金鎭厚), 선천의 오치은(吳致殷), 철산의 오희원(吳熙源) 등의 재정적 원조로 가능했다. 교육 방침은 ① 건전한 인격의 함양 ② 애국정신이 투철한 민족운동가 양성 ③ 실력을 구비한 인재의 양성 ④ 건강한 체력의 훈련 등에 두었다. 첫 입학생은 90여 명이었다. 이후 민족사학으로 알려져 입학 지원자가 500∼600여 명이 되는 때도 있었다. 교장에 윤치호, 대변교장에 안창호, 교무 책임에 장응진(張應震), 교사에 차이석(車利錫)·김두화(金斗和)·나일봉(羅一鳳)·장기영(張基永)·문일평(文一平)·황의돈(黃義敦)·최예항(崔叡恒)·유기열(柳祈烈)·김현식(金鉉式)·유진영(劉鎭永)·김진초(金鎭初)·이상재(李相在), 체조교사에 정인목(鄭仁穆)·이승설(李昇卨) 등이 근무하였다. 1910년부터는 장응진을 소장으로 한 하기 사범강습소를 부설하여 교사들의 재교육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1909년 이 학교를 중심으로 여러 사립학교들이 일본 국기 불게운동(不揭運動)을 전개한 것이 사건이 되어 폐교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안창호는 이 사건과 105인 사건 등으로 곤란한 처지가 오게 되자 1910년 4월 ‘거국가(去國歌)’를 남기고 망명하였다. 학교는 1912년 봄 제1회 졸업생 19명을 배출하고 폐교를 맞았다. 이 학교는 윤치호가 초대 교장으로 안창호가 대변 교장이란 사실이 주목된다. 이 사실은 이광수의 기록에서도 확인 된다. 1927년 대중잡지‘東光’ 제10호에 쓴 ‘規模의 人-尹致昊 氏’라는 글에서 이렇게 기술하였다. "윤치호가 105인 사건에 피체된 것은 안창호씨와 지기상통(志氣相通)하여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의 설립 위원장이 되고 평양 대성학교 교장이 되었었다. 청년학우회는 조선 최초의 조직적인 정치적 결사라고 할 만한 신민회(新民會)의 별동대(別動隊)였고 평양 대성학교는 신민회의 3대 사업(정치적 결사, 산업진흥, 교육진흥)의 하나인 교육사업의 제1기 사업이요 아울러 본거(本據)였다. 이러한 사업에 수뇌(首腦)로 추대된 것이 이유가 되어 사내 총독 암살 음모사건에 수모자(首謨者)로 걸리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지기상통하여 대성학교 교장으로 활동하고, 신민회의 대표로 활동하여 사내 총독 암살 음모사건의 주모자로 형을 살게 되었다고 한 것이다. 결국 작사자 논란의 두 주역 윤치호와 안창호는 1905년부터 1910년까지는 지기상통의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안창호는 학교 운영상 명성이 높은 윤치호를 교장으로 모셔 학생 모집과 학교 운영상의 도움을 받는 것은 물론 해외 활동에 대비한 것이다. 개교식에 윤치호는 개교 환영사를 했고, 3여년을 재직하였다. 그런데 이 대성학교와 애국가의 관계도 주목이 된다.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의 애국가 작사자 조사를 계기로 드러난 사항이다. 먼저 1910년 대성학교에서 수학교사로 재직했던 채필근(蔡弼近/1885~1973) 목사의 증언을 살펴보기로 한다. 장로교 목사이며 신학자이다. 보기 드문 동경제대 출신의 엘리트 목회자로, ‘120년의 한국 개신교 역사에서 가장 해박한 지식인’이라는 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채필근은 평안남도 중화(中和)출신으로 1905년 숭실학교를 마치고 1913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 직전인 1910년부터 대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쳤다. 그리고 이 기간에 안창호로부터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라고 들었다는 것이다. 1955, 4월 기독교 전문지 ‘신앙생활’에 발표한 글이다. "내가 25세 때에 대성학교(안창호 운영)에서 수학을 가르쳤지요. 그때 내가 도산 선생에게 ‘애국가는 본교 명예교장 윤치호 선생이 작사했습니다.’란 말씀을 직접 들었습니다. 내가 황실가(皇室歌)와 태극가(太極歌) 등 옛 노래들을 평양서 해방 후까지 보존했는데 황실가와 애국가는 전혀 다릅니다. 내 기억력에 이상이 없다면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씨 입니다.” 이 같은 사실을 김인서 목사가 한국전쟁 중 들었던 것을 자신이 발행하는 종교전문지에 소개하여 알려진 사실이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애국가 작사자 규명작업을 벌여 대척 관계가 된 당사자인 ‘안창호는 윤치호가 작사했다고 밝혔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증언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윤치호의 1906~1907년 작사→1910년 국민회의 ‘국민가’ 채택→국민회의 애국가로 사용→1940년 임시정부, 국민회 안익태 애국가 신곡보 사용 허가→1945년 9월의 자필<가사지> 존재라는 맥락적인 흐름을 재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다음은 안창호의 생애와 흥사단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인 주요한(朱耀翰, 1900~1979)의 증언이다. 주요한은 '흥사단 맨'이다. 1920년 5월 14일 흥사단 입단식에서 이광수는 입단 번호 104번, 주요한은 105번을 받았다. 그리고 원동지역 회원으로 이광수가 1호, 주요한이 2호로 입단하였다. 임시정부 초기에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함께 했고, 해방 후에 흥사단을 재건하고 방대한 안창호에 대한 전기를 저술했다. 1963년 발행된 ‘안도산전서(安島山全書)’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였다. 대성학교 시절의 일부이다. "대성학교 대리 교장으로 있던 도산이 하루는 서울에서 내려온 교장 윤치호를 보고 '성자신손 오백년은'으로 시작되는 애국가에서 '이 가사가 적당하지 아니하므로 고쳐서 부름이 좋겠으니, 교장께서 새로이 한 절을 지어 보시라'고 청했다. 이에 윤 교장은 '미처 좋은 생각이 아니 나니, 도산이 생각한 바가 있는가?' 하매 도산이 책상 서랍에서 미리 써 놓았던 것을 꺼내 보인 것이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되는 애국가 첫 절이었다. 윤치호는 즉석에서 그것이 매우 잘되었다고 칭찬하였고 도산은 '그러면 이것을 윤 교장이 지은 것으로 발표합시다'라고 하여 그 뒤부터 대성학교에서 새 가사로 부르게 되고 나중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대성학교 개교 후 안창호가 짓고, 윤치호가 지은 것으로 발표하였다는 주장이다. 허술한 짜임새의 주장인데다 명의를 바꾸었다는 것은 오늘이나 당시나 두 사람 사이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대성학교 설립과 '역술 찬미가' 발행 시점에서 오류임이 드러난다. 즉, 흥사단이 밝힌 대성학교 개교는 1908년 9월이다. 그러나 애국가인 ‘애국적 찬미가 14장’을 수록한 ‘찬미가’가 발행된 1908년 6월 25일이다. 더욱이 애국가가 1907년에 작사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이러함에서 위의 '도산전서' 기록은 성립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더욱 의외인 것은 주요한이 정 반대의 주장을 한 바가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 주장을 하기 8년 전인 1955년 4월 19일자 경향신문 기고문 '애국가 작사자는 누구?'에서 주장한 것이다. "안도산이 지었다고 하는 것은 세간에 널리 유포되고 있는 설이지만은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은 일종의 신화적인 설이다. 도산이 작사자라고 하는 직접적인 증명을 가진 사람을 필자는 아직 만나지 못하였다. 또한 도산 자신의 입으로 그러한 말을 하는 것도 들어 본 적이 없다."이런 주요한의 입장 변화는 의외가 아닐 수 없다. 문제는 후세인들이 어느 하나만 보고 편견을 가질 수가 있다는 것이 문제다. 결과적으로 첫 주장은 순수한 개인적 소신 표명일 것이나 후에 흥사단 업무를 맡으면서 압력에 의해 번복을 한 것이다. 이상과 같이 안창호가 설립한 대성학교 교사의 증언을 통해 "대성학교 시절 안창호가 윤치호 작사라는 말을 하였다”라고 확인하였다. 그리고 애국가가 수록된 ‘찬미가’가 6월에 발행되었는데, 그 2개월 후 대성학교에서 "안창호가 짓고 윤치호의 명의로 발표하였다”는 주장은 주요한의 왜곡이다. 결론은 "대성학교에서도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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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한국 전통춤 계승과 발전방향문화론적 시각과 미래 방안 1. 전통춤 패러다임과 계승 문제의 접근방법 문화는 시대가 변하고 사회환경이 변함에 따라 새롭게 적응하면서 변천한다. 따라서 시대가 변하고 문화가 발전하면 새로운 패러다임(paradigm)이 형성되며 춤의 양상(樣相)과 양태(樣態)도 마찬가지로 시대에 따라 변모(變貌)한다.서양춤의 변모는 고대의 의식적(儀式的)인 리투얼 댄스(Ritual Dance)로부터 중세 포크댄스(folk dance)와 코트댄스(court dance), 절제와 균형의 합일을 강조하는 18세기 클래식 발레(Classical Ballet), 꿈과 이상의 도약을 향한 19세기 로맨틱 발레(Romantic Ballet), 로맨틱 발레(Romantic Ballet)의 주관적인 형식미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에서 창조된 모던 댄스(Modern Dance)로 변화되는 과정을 거쳐 왔다. 한국춤 역시 고대의 제천의식춤(祭天儀式舞), 중세의 종교의식춤(宗敎儀式舞), 민속춤(民俗舞), 근세의 궁중춤(宮中舞), 민속춤(民俗舞), 종교의식춤(宗敎儀式舞), 현대의 전통춤(傳統舞), 창작춤(創作舞), 외래춤(外來舞) 등 각 시대별로 주요한 패러다임(paradigm)이 존재해 왔으며, 또 각 시대별로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해 구시대의 패러다임이 대체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편의상 우리는 근대이전 시대의 전통양식을 갖춘 춤들을 통틀어 ‘전통춤’이라고 하고 근대 이후에 유입된 발레와 모던댄스를 ‘외래춤(외국춤)’으로 구분한다. ‘한국춤’은 협의로 전통춤과 한국창작춤을 포함하여 말하기도 하고, 광의로 한국에서 한국인이 추는 외래춤까지도 포괄하기도 한다. 명칭도 한때는 ‘신무용’, ‘고전무용’, ‘한국무용’, ‘민속무용’, ‘전통무용’ 등으로 두서없이 부르기도 하였고, ‘무용’과 ‘춤’도 혼용하여 현재도 사용하고 있다. 근대는 갑오경장 이후 서구 열강들과 교류가 시작되면서 모든 문물이 서서히 유입되고 변화양상을 보이면서 1902년 협률사의 등장으로 과거에 궁중과 기방 등에서 추던 춤들이 최초로 극장공간과 공연문화가 태동하면서 극장춤으로 시도되었다. 외국춤이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1920년대 이후는 발레와 현대춤이 자리 잡아 가면서 전통춤과 창작한국춤과 함께 한국춤계를 주도하며 저변을 확대해갔다.이에 근현대를 거치면서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는 전통춤의 계승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문제점을 파악하고 문화론적 시각에서 계승문제를 접근하고 미래 발전방향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전통춤 계승에 관한 다양한 문제점 중에서 문화환경적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문제점을 제기하여 계승문제를 파악하기로 한다.① 외래문명 범람에 대한 국가사회적 대처능력 문제② 외래문화에 대한 우월주의와 전통문화에 대한 비하주의 문제③ 사제전승의 도제식(徒弟式) 전수교육의 문제④ 새로운 전통문화 창조와 발전 문제 2. 전통춤 현황과 접근배경 1) 전통춤 종류와 무형문화재 지정종목 현황 한국의 전통춤도 시대변천에 따라 부침(浮沈)을 계속하면서 현대까지 전승되었다. 이상은 전통춤 분류와 몇몇 종목의 예시일 뿐이고 근현대로 전승한 궁중춤 50여종, 무당들의 무구춤 300여종, 재인청춤(화성 50여종, 안성향당춤 40여종)과 전통예인들이 전승한 춤(한성준 80여종, 김인호 30여종, 김덕명 20여종) 등등 정병호 정리 370여종을 포함한 필자 조사 1000여종의 전승춤 등 수없이 많다.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춤종목은 강강술래(8호, 소리춤), 진주검무(12호), 승무(27호), 승전무(21호), 처용무(39호), 학연화대 합설무(40호), 태평무(92호), 살풀이춤(97호) 등 8종이며, 지방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춤종목은 한량무(서울45호), 살풀이춤(서울46호), 동래학춤(부산3호), 동래고무(부산10호), 동래한량춤(부산14호), 승무·살풀이춤(경기8호), 안성향당무(경기34호), 고깔소고춤(경기56호), 승무(대전15호), 입춤(대전21호), 살풀이춤(대전20호), 승무(충남27호), 살풀이춤(대구9호), 호남살풀이춤(전북15호), 한량춤(전북44호), 호남산조춤(전북47호), 예기무(전북48호), 진주한량무(경남3호), 진주포구락(경남12호), 진주교방굿거리춤(경남21호), 범패와 작법무(인천10호), 날뫼북춤(대구2호), 수건춤(18호), 진도북춤(전남18호), 화관무(황해4호), 평양검무(펑남1호), 부채춤(평남3호) 등 27종이 있다. 그밖에도 중국 동북3성 등지에서 전승되는 조선족춤 중에도 많은 춤종목이 비물질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전승하고 있다. 즉 유네스코에 등재된 조선족농악무(象帽舞、乞粒舞)를 비롯하여 길림성의 조선족아박무(牙拍舞, 안도현), 조선족부채춤(연변주), 조선족칼춤(도문시), 조선족원고무(도문시), 조선족학춤(안도현), 조선족접시춤(훈춘시), 조선족장고무(도문시), 조선족손북춤(手鼓舞, 도문시), 조선족방치춤(棒槌舞, 도문시), 조선족상모춤(연변주, 국가급), 조선족삼노인(화룡시), 조선족탈춤(도문시), 조선족칼춤(연변주), 조선족찰떡춤(떡메춤 打糕舞, 연변주), 요녕성의 조선족농악무(农乐舞, 乞粒舞, 본계), 조선족탈춤(철령), 흑룡강성의 조선족접시춤(碟子舞, 감남현), 조선족물동이춤(顶水舞, 목단강시), 조선족아박무(牙拍舞, 해림시) 등 20여종이 지정되어 있다(2012년 목록). 2) 전통춤 계승문제의 접근배경전통춤 계승문제를 분석하는 도구로 <문화의 5대 특성>과 <문화인류학적 3대 시각>에서 전통춤의 계승문제를 분석하고 나타난 문제점을 미래지향적으로 해결하는 발전방향을 제시하기로 한다. 현대생활에서 다양한 분야에서 흔히 쓰이는 ‘문화(culture)’는 학습성(후천성), 공유성, 축적성, 변동성(다양성), 전체성(통합성) 등 5대 특성(속성)을 가진다.① 학습성(후천성): 인간의 문화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학습된다는 것이다. ② 공유성: 인간은 서로 공통된 행동과 생활양식, 즉 서로 고유한 문화를 공유하게 된다.③ 축적성: 문화는 서로 발달하고 상호작용하며 축적되면서 진보하게 된다.④ 변동성(다양성): 축적되는 문화를 통해서 항상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변동하여 발전한다.⑤ 전체성(통합성): 문화는 다양한 요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로 비슷하게 연관되어 통합성을 지닌다. 또한 문화인류학의 문화에 대한 시각에는 ‘총체론적 시각(holistic perspective)’, ‘상대론적 시각(relative perspective또는 cultural relativism)’ 그리고 ‘비교론적 시각(comparative perspective)’이 있다(한상복 외, l985). ①총체론적 시각(holistic perspective) 문화는 생활양식의 여러 측면, 즉 정치, 경제, 법률, 가족, 친족, 종교, 예술, 관습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 문화를 이해하는 데는 그 민족의 생활관습이라든가 사고방식, 생산양식, 인간관계, 신앙생활 등 여러 측면을 고려하여 그 문화와 관련된 많은 항목들과 총체적으로 연관지어 설명해야 의미관련(relevance)을 좀 더 명확하고 본질적이고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승무는 언제, 어디서, 누가, 왜, 어떻게, 무엇으로 추었는지를 종합적으로 파악하여야 하는데 흔히 춤사위와 계보 수준에서 머물면 그 춤의 총체적인 면을 알 수가 없이 춤동작만 하게 된다는 것이다. ②상대론적 시각(relative perspective, cultural relativism)타문화를 자신의 문화와 대등한 입장에서 사회적 맥락과 그 민족의 생활사(life history)를 이해하려는 것으로 타문화를 함부로 평가 비하하거나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자세이다. 어느 민족의 문화이건 각기 역사와 가치, 신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타문화에 대해 편견이나 ‘자민족중심주의(문화국수주의, ethnocentrism)’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것은 ‘문화적 상대주의(cultural relativism)’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문화는 아무리 미개민족의 하찮은 민속춤이라 할지라도 예술적으로 뛰어난 발레와 비교하여 우열을 가리거나 자기 민족춤은 우수하고 타민족춤은 열등하다는 시각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그동안 근현대기를 지나면서 한국전통문화를 우월하게 놓거나 비하하는 수많은 사례를 겪으면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전통춤에서도 한국과 여타 아시아국의 춤에 대해 비교우위나 비하의식이 남아있고, 무형문화재 지정춤과 비지정춤에서도 같은 현상이 나타나면서 추종과 외면현상으로 수많은 춤들이 소멸되는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흔히 궁중춤은 품격이 있고 민간춤은 저급하다는 시각과 문화재 지정춤은 우수하고 비지정춤은 열등하다는 시각은 그릇된 태도이며 다같이 소중한 한국전통춤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③비교론적 시각(comparative perspective)비교론적 시각은 두 지역 이상의 민족이나 지역의 문화를 비교 연구하여 유사성 또는 공통점과 상이성을 명확히 규명하여 ‘보편화(普遍化, generalization)’하고 ‘특정화(特定化, specification)’하는 것이다. 즉 인간사회와 문화의 본질을 ‘일반화(一般化)’하는 관점을 말한다. 예를 들어 한영숙살풀이춤(재인계, 서울중부지역)과 이매방살풀이춤(기방계, 호남지역), 김숙자살풀이춤(신당계, 경기남부지역) 등의 보편성과 일반성, 지역성, 공통성, 상이성 등을 명확히 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3. 전통춤 계승의 문제점 1) 문화환경적 관점에서 본 문제점 문화환경적 관점에서 볼 때 전통춤은 이러한 특성에 맞게 잘 전승하고 있는지 파악해 볼 수 있으며, 구체적으로 전통춤 계승에서 나타난 문제를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외래문명 범람에 대한 국가사회적 대처능력 문제 –정책과 여과능력 부재 국권마저 상실했던 근대시기에 아무런 대응과 여과 없이 일본을 통해 서구문명이 유입되었다. 1926년 이시이바꾸(石井漠)을 통해 서구 현대무용이 유입되었고, 최승희, 조택원들이 제자로 일본유학을 다녀와 한국무용계를 주도하였다. 미국을 위시하여 유럽을 통해 지속적으로 발레와 현대무용이 유입되어 한국무용계에는 한국무용(전통춤 포함), 현대무용, 발레의 삼분법으로 대학무용학과가 설립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② 외래문화에 대한 우월주의와 전통문화에 대한 비하주의 문제- 열등주의와 사대주의 19세기말 갑오경장(1894)으로 구시대적 문물제도를 버리고 서양의 법식을 본받아 새 국가체제를 확립하려는 개혁을 기점으로 근대화는 점차적으로 정착되어갔으며, 한편에서는 한국 사회의 내재적 사정을 반영한 측면을 중시하였고 그것은 민족적 자각의 발로가 되어 민족주의가 발현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신문화의 유입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힘입어 ‘신무용’이 ‘예술’로 인정되면서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나 전통시대의 춤을 ‘비예술(非藝術)’로 기녀나 무당이나 민간인들이 추는 낡고 촌스런 문화로 무시하는 경향도 팽배하게 되었다. 한편에서는 이에 대응하는 민족주의의식이 깨어나 최남선, 손진태, 송석하 등의 민족주의자들이 민속문화를 연구하고 민족자각 의식을 일깨우는 노력을 하였고, 신무용에 대응하는 전통춤을 발굴하고 무대화하는 노력도 미약하나 발현되기도 하였다. 1902년 협률사와 1907년 광무대 등에서 재인청출신 김인호와 뒤를 이은 한성준 등이 전통춤의 무대화를 위해 기녀들에게 춤을 가르치고 지도하여 무대에 지속적으로 올리고 정립하였다. ③ 사제전승의 도제식(徒弟式) 전수교육의 문제-원형전수와 폐쇄적 교육 한국의 전통적 교육방식은 도제식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예능분야 역시 스승의 독창적 비법을 전수받아 구전심수(口傳心授)로 계승하였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똑똑한 제자들은 스승의 기법을 배우고 자기개발을 통해 더욱 문화예술적으로 승화시키고 발전시켜나갔다. 그런데 무형문화재법이 제정된 이후로는 ‘원형전수’라는 미명하에 스승의 기법을 한 치라도 변화시키면 위법이라고 하여 문화의 발전지체 현상 속에 오늘에 이르렀다. 우리는 이매방 승무와 살풀이춤을 순서 하나라도 틀리면 큰 죄를 짓는 국가문화적 구조 속에 살고 있다. ④ 새로운 전통문화 창조와 발전 문제 –창조적 계승의 원천봉쇄 해방 후에는 더 개방적이어서 미국과 유럽등지에서 외래문화가 직수입되어 이전보다 수용과 대응문제에서 여전히 갈피를 못 잡아 왔다. 전통문화의 위급상황이 되니 극약처방으로 1962년 문화재보호법(법률 제961호)을 시행하게 되어 승무, 살풀이춤, 태평무 등을 무형문화재 춤종목으로 지정하여 국가적 보호아래 보존 전승하게 되었다. 그리고 50여 년 동안 문화재보호법에 안주하여 특혜를 누리면서 지내왔지만 지정되지 못한 수많은 전통춤들은 반대로 더 소외되고 인멸되는 비극을 잉태하였다. 게다가 ‘원형보존’이라는 무형문화재법의 지시를 거스를 수 없어 일방적 전수만이 지속되면서 조선시대에 머물러 있다. 변화해가는 현대문화와 세계화에 더욱더 멀어지고 대한민국시대의 전통춤을 창조해내지 못하는 편식과 전통문화적 암흑기를 맞이하고 있다. 2) 제도적 관점에서 본 문제점 ① 무형문화재 제도 지정당시의 문제-전통문화의 소멸위기-국가관리 전통문화의 위급상황이 되니 극약처방으로 1962년 문화재보호법을 시행하게 되어 승무, 살풀이춤, 태평무 등을 무형문화재 춤종목으로 지정하여 국가적 보호아래 보존 전승하게 되었다. 결국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근대 국제정세의 서세동점(西勢東占)과 근현대화로 인한 ‘전통문화유산의 소멸위기’를 극복하려는 시급성 때문이었다. ② 무형문화재 제도 현재의 문제-‘원형’보존의 박제화-‘전형’ 개념도입현재는 ‘문화원형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상 전승과 평가의 기준이 되는 ‘문화원형 실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 또한 불확실하고 애매한 것이다. 원형(原形)과 원형(原型)은 있긴 있으나 고정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즉 문화의 속성은 원형질(原形質)은 있으나 형태(形態)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는 가변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무형(無形)문화재인 것이다. 문화원형은 ‘나무의 나이테’처럼 해마다 변화된 형태를 남기면서 ‘성장(成長)하는 생명체(生命體)’와 같은 것이다. 시간의 흔적은 있으나 고정된 형태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최소한의 ‘시형(時形) 또는 시형(時型)’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문화재보호법이 시행된 지 50여년이 지나는 과정에서 사라져가는 전통문화의 보존전승이라는 순기능에도 불구하고 비지정문화재의 무관심과 소외현상도 심화되는 역기능도 나타나고 있으며, 지정종목도 ‘원형전승’이라는 굴레에 사로잡혀 퇴보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어서 2015년 다시 ‘무형문화재법’이 제정되면서 ‘원형(原形)’논리에서 ‘전형(典型)’으로 그동안 지나치게 박제화 되었던 무형문화재의 발전변모의 가능성을 담보하면서 유네스코 무형유산 운영기준과 연계한 법안으로 시행하기에 이르렀다.근본적으로 전통시대의 문화 변동은 극히 제한적이거나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느슨하고 장기적인 변화였다. 이러한 정적인 문화환경에 살아온 한국인은 근대 서구문명의 범람과 현대화 과정에서 동적인 문화변동에 대처능력도 미흡했고, 보수적인 시각으로 개혁에 미온적이어서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도제식으로 똑같이 재현하는 방식으로 전수받아온 장인정신은 변화를 부정하고 자연발생적이고 수동적인 전승에 안주하여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일각의 전승 성향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4. 전통춤의 미래 발전 방향 1) 전통춤에 대한 문화론적 발전 방향① 문화에 대한 3대 시각인 '총체론적 시각(holistic perspective)', '상대론적 시각(relative perspective)' ,'비교론적 시각(comparative perspective)'을 견지해야 한다. 특히 '상대론적 시각(relative perspective)'으로 1000여종에 이르는 비지정 춤에 대한 관심과 전승에 지정춤과 동격으로 전승발전에 관심을 가지고 작품화, 무대화, 전승력을 키워야 한다. ② 문화의 5대 특성인 학습성(후천성), 공유성, 축적성, 변동성(다양성), 전체성(통합성) 등의 입장에서 발전시킨다. 특히 변동성(다양성)에 관심을 가지고 이제는 ‘원형’보다는 ‘전형’의 개념으로 발전적인 방향모색이 필요하다. 전형개념에는 ‘원형’과 ‘발전’이라는 두 가지가 존재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즉 최초 전수 당시의 춤을 기본으로 간직하며 시대변화에 적응하는 발전적인 노역을 경주하는 이중적이고 양면적 전승이 필요하다. 이것이 또한 축적성이며 역사성이 되어간다. 2) 전통춤에 대한 원론적 발전 방향 ① 삼원적(三元的) 전승방향 국제로 시야를 넓혀 한국과 가까이는 한중일, 그리고 세계라는 차원에서 볼 때 결국 삼원적(三元的)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즉 한국의 전통춤을 원형대로 지켜나가는 일(원형적 전승), 전통춤을 현시대에 맞게 발전시켜나가는 일(발전적 전승), 세계가 하나로 집약되고 가까워지는 현대사회에 세계춤과 함께할 수 있는 예술춤을 창조해 나가는 일(창조적 전승)이다. ② 세계화 방향 지금까지 전통문화는 「토착화」에 주력했다면 이후는 세계적인 「보편화」가 과제이다. 소멸되던 전통춤은 일차적으로 한국화(韓國化)작업이었다. 글로벌시대에는 세계화가 어느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대세이다. 주체성이 ‘국내적’(한국문화, 한국춤)이라면 세계성은 ‘국제적’(국제문화, 국제춤)이다. 주체성이 자기를 지키는 ‘보수’라면 세계성은 자문화와는 별개로 타문화를 받아들이는 ‘개방’이다. 또 문화논리로 보면 주체성은 ‘전통성, 수구성, 독창성’이고 세계성은 ‘외래성, 통합성, 전파성’에 비유된다. 즉 주체성(국내문화)과 세계성(국제문화)을 풀어가기 위해서는 두 명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상반관계’가 아니라 ‘상호관계’에서 출발해야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문화수입이 문화수출보다 비중이 더 컸다. 그러나 문화예술의 국제경쟁력 측면에서 보면 여태 밑지며 살아왔다. 남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만 급급했지 우리문화를 세계시장에 내세우는 노력은 미흡했다는 것이다. 최근에 비로소 ‘한류문화, K-culture’(K-pop, 한국음식, 화장품, 드라마 등)가 세계무대에 전파되기 시작하는 추세이다. 따라서 전통춤이 국내적으로 스포츠댄스, 힙합 등에 외면당하고 있는 현실을 극복하는 일과 더불어 ‘한류춤, K-dance’로서 세계무대로 지평을 넓혀 나가야 한다. ③ 대한민국시대 신전통춤의 창조 노력 5천년의 한국 문화사에서 전통문화의 대표적인 사례로 도자기문화를 살펴보면 선사시대 토기에서 고려시대 상감청자를 거쳐 조선시대의 백자기로 창조하여 찬란한 전통문화로 자리매김하였다. 전통춤도 시대별로 다양한 춤들이 창조되고 전승되었다. 근세말 효명세자는 20종의 궁중춤을 창조했다. 김인호와 한성준은 100여종의 전통춤을 정립하여 전승시켰다. 그러나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한국무용가들은 대한민국시대 전통춤을 창조 또는 재창조하고 있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조선시대나 근대의 과거춤에 매달려 미래춤을 창조하는데 소홀히 했다. 우리보다 북한은 전통춤은 무시했지만 민족적인 색채를 띤 새로운 민속춤을 부단히 창출했다. 물론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우리가 전통고수에 매달리는 동안 북한은 재창조에 매달렸다. 이제부터라도 새로운 신전통춤, 재창조춤 등을 지속적으로 창조해내야 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김백봉 부채춤은 세계무대에서는 한국민속춤으로 이미 자리매김하고 있는데 우리는 전통춤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경향이다. 이러한 신전통춤들이 쏟아져 나와야 미래국가시대가 도래했을 때 대한민국시대에 찬란한 전통춤들이 창조되었음을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문화(춤)는 생명체는 아니지만 생명력(전승력)을 지니고 진화하며 오랜 동안 전승하게 되는데 문화의 속성에서 벗어나면 소멸된다.” -이병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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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관의 ‘국악-신반’ <11>정창관/한국고음반연구회 부회장 김민지 가야금 연주자의 첫 음반, '김윤덕류 가야금산조'이다. 연주자는 중앙대학교에서 학사, 석사, 박사 과정을 마치고 지금은 국가무형문화재 가야금산조 및 병창 이수자로 중앙가야스트라 악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윤덕 명인은 전북 정읍 출신으로 정남희 명인으로부터 가야금산조를 배워 1968년 국가무형문화재 가야금산조 부문 첫 보유자가 되었다. 그의 산조는 이명희 명인에게 이어져 김윤덕류로 명명되어 있다. 연주자는 이영희 명인을 사사하였다, 김윤덕류는 뿌리가 실하고 호쾌하고 다른 산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드렁조가 존재함으로 이색적인 느낌을 준다고 한다. 산조는 ‘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휘모리-단모리’로 이어지는 6악장으로 2022년 6월 11일 한국문화의 집에서 공연(김민지 가야금독주회 ‘김윤덕, 흩어진 가락’)한 실황 녹음이다. 장단은 김청만 명인이 잡았다. 해설서는 간단하며, 실황이지만 가야금 소리는 깔끔하며 장단도 조화롭다. ● 김죽파류 산조 음반을 출반한 다른 김민지 연주자가 있음. 양은희 '추담제 수궁가' 이 3장의 음반, 양은희 '추담제 수궁가'는 2014년에 국악방송 991스튜디오에서 녹음한 판소리 완창으로 PC로 제작하여 홍보용으로 사용한 음반이다. 최근에 디지털음반(음원사이트), USB음반, SD음반으로 다양하게 보여 구하게 된 음반이다. 양은희 연주자는 원광대학교와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음악학 석사를 마친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2호 수궁가 이수자이다. 2017년 시작한 브랜드기획공연 ‘부창부수’를 지금까지 이어가고 있는 판소리꾼이다. 수궁가는 소리꾼의 첫 음반이다. 추담는 전북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홍정택 명창의 호이다. 추담제는 사라질뻔한 정정렬, 이기권 명창의 수궁가를 새롭게 다듬고 김연수 명창의 동초제를 일부 차용하여 완성한 한 바탕이다. 3장의 음반은 트랙 작업이 잘 되어있으며 북은 박정철 고수가 맡았다. 2014년 녹음이지만, 오래간만에 들은 판소리 한바탕이다. 음원사이트에서는 디지털음반 <추담제 수궁가> 1, 2, 3집으로 쉽게 만날 수 있다. 해설서가 전혀 없어 아쉽다. 유성기음반 : 1925년 난난타령 '아쥬가루동백아여지마라'-해주아리랑- 1925년 출반된 유성기음반 닙보노홍 K-158A 난난타령 <아쥬가루동백아여지마라>의 복제품이다. 12번째 복제품으로 20장을 제작하고 있다. 1925년 출반된 2장 4면 중 첫 면(K-158A)을 복제한 것이다. 1923년 녹음으로 ‘해주아리랑’의 첫 모습입니다. 당시 광고에는 ‘강원도아리랑’으로 표기하고 있다. 음반 뒤에 부착한 제작자의 글을 인용한다. 1925년 일본 일본축음기상회의 3번째 녹음(1923년)에서 <난난타령>(닙보노홍 K-158A. B. K-159A. B) 2장(4면)이 출반됩니다. 그 중 첫 곡인 K-158A <난난타령 아쥬가루동백아여지마라>를 복제했습니다. <난난타령>은 조선레코드총목록에는 <강원도아리랑>으로도 표기되어 있습니다. <해주아리랑>의 첫모습입니다. 유성기(SP)음반은 유성기로 들어야 제멋을 느낄 수 있습니다. 유성기로 감상하기 위해 제작하였습니다. 본 음반은 영국(Vulcan Record Co.)에서 쪽 반으로 제작하였습니다. (현재 양면 제작 불가) 음원은 제작자가 소유한 유성기 음반으로 악당이반(대표 김영일)에서 녹음·숙달(엔지니어 오지영)(엔지니어 오지영)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음원이 길어 소개 목소리를 앞에 넣지 못했습니다. 해설서의 가사채록이 미진합니다. 양해 바랍니다. 유성기음반 : 1934년 남도민요합창 '진도아리랑'-김소희. 오비취- 1934년 출반된 유성기음반 Okeh 1728 남도민요합창 '진도아리랑'의 복제품이다. 13번째 복제품으로 20장을 제작하고 있다. 김소희 명창이 부른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실제는 김소희, 오비취 명창이 같은 비중으로 부른 음반이다. 김소희 명창의 회고에 의하면 녹음시에는 ‘남도아리랑’을 넣었는데 출반시에 곡명이 ‘진도아리랑’이 되었다고 한다. 음반 뒤에 부착한 제작자의 글을 인용한다. 1934년 Oke(No. 1728) 레이블로 출반한 남도민요합창 <진도아리랑> 유성기음반의 복제품입니다. 김소희, 오비취 명창이 부릅니다. ‘진도아리랑’의 첫 모습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출반된 ‘진도아리랑’은 3종입니다. 유성기(SP)음반은 유성기로 들어야 제멋을 느낄 수 있습니다. 유성기로 감상하기 위해 제작하였습니다. 본 음반은 영국(Vulcan Record Co.)에서 쪽반으로 제작하였습니다.(현재 양면 제작 불가) 음원은 제작자가 소유한 유성기음반으로 악당이반(대표 김영일)에서 녹음.마스터링(엔지니어 오지영)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앞부분에 음반 소개 목소리는 제가 넣었습니다. 해설서는 원본 해설서를 참조하여 만들어 보았습니다.향후 주요한 ‘아리랑’ 유성기음반을 계속 제작할 예정입니다. 많은 성원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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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 유성기음반 궁중음악, 함께 들어볼까요?국립국악원 (재)아름지기, ‘유성기집, 우리 소리를 보다’ 전시 개최해 한국 전통 음악을 지켜온 국립국악원(원장 김영운)과 우리 문화의 가치와 미감을 전하는 아름지기(이사장 신연균)가 만나 유성기음반을 주제로 한 전시 ‘유성기집, 우리 소리를 보다 House of Records, See the Sound’를 오는 5월 26일(금)부터 6월 30일(금)까지 아름지기 통의동 사옥에서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그간 국립국악원 아카이브가 수집과 기증 등을 통해 보유한 유성기음반의 음원을 복각해 유성기음반을 소비했던 당시의 공간을 꾸며 관련 자료의 전시와 함께 일반에 공개하기 위해 마련했다. 유성기(Gramophone)는 소리가 녹음된 원반(SP, Standard Play)을 재생하는 장치로, 19세기 전후 조선에 처음으로 소개되었는데, 당시 유성기가 있는 집에 삼삼오오 모여 소리를 듣던 곳을 ‘유성기 처소’라고 불렀던 기록이 남아있다. 국립국악원은 이번 전시를 위해 전시공간의 이름을 ‘유성기집’이라 정하고, 실제 ‘유성기 처소’가 많았던 종로구 통의동 인근의 전통문화 전시공간인 아름지기에서 이번 전시를 진행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국립국악원이 소장하고 있는 유성기음반 중 대중들이 쉽게 들을 수 없었던 음반과 명인 명창들의 인기 음반 약 30여 점의 61개 음원을 당시의 사진과 홍보물 등 관련 자료와 함께 소개하고, 국립국악원 아카이브 누리집(arichive.gugak.go.kr)을 통해서는 그동안 복각했던 50여 점의 유성기음반에 수록된 100여 개 음원을 모두 공개한다.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궁중음악 음반 ‘조선아악’, 이화중선, 임방울, 김소희 등 당대 명창이 부른 ‘춘향가’ 비교해 들어볼 수 있어 이번 전시는 총 3층으로 구분된 공간에서 유성기음반 관련 자료의 전시와 함께 음원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된다. 1층 ‘소리를 기록하다’에서는 국내에 유성기가 소개되고 음반 산업이 시작된 역사와 음반에 담긴 음악과 인물을 소개한다.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궁중음악 음반이자 대중들에게 궁중음악을 널리 알리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던 ‘조선아악朝鮮雅樂(1928)’과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이화중선, 임방울, 김창룡, 박녹주, 김소희 명창 등의 음반을 신문 광고, 노래 가사지, 사진 등의 자료를 통해 유성기음반이 대중문화와 예술에 끼친 영향과 음악의 문화 변화를 읽어볼 수 있다. 빅터 레코드가 제작한 ‘조선아악’은 궁중음악의 첫 녹음이다.국립국악원의 전신이자 조선조 장악원의 음악을 이어온 일제강점기 이왕직아악부 음악을 녹음한 것. 조선조 궁중에서 연행되는 제례악과 연례악이 다양하게 수록되어 있다. 2층은 한옥 풍류방과 오디오룸으로 구분해 한옥 공간에서는 당시 ‘유성기 처소’에서 들었던 유성기음반을 유성기로 직접 들어볼 수 있게 꾸몄다. 국립국악원은 이번 전시를 위해 1925년 제작된 크레덴자(Credenza) 유성기를 구해 전시 기간 중 오후 2시 30분부터 20분간 1930년대와 50년대의 민요 관련 음반을 들려줄 예정이다. 오디오룸에서는 국립국악원이 디지털로 복각한 61개 유성기음반의 음원을 감상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했다. 3층 공간에서는 옛 소리를 활용한 예술가의 음악을 소개한다. 국립국악원 소장 음원을 활용해 제작한 한국관광공사의 ‘강강술래(by 우원재)’를 비롯한 ‘필 더 리듬 오브 코리아(Feel the Rhythm of Korea)’와 국립국악원의 영상 및 전통 음악인 이희문의 작업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이번 전시와 관련한 연계행사 또한 다양하다. 6월 매주 토요일 오전 11시에는 한국음반아카이브연구소장 배연형, JTBC ‘풍류대장’ 프로듀서인 황교진, 국악음반박물관장 노재명의 강연과 소리꾼 이희문의 토크콘서트를 진행한다. 오후 2시에는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단원들의 ‘가야금산조’, ‘대금산조’, ‘경기잡가’, ‘판소리’ 공연도 차례로 선보일 예정이다. 전시 관람은 무료이고, 전시 연계행사는 아름지기의 네이버 예약을 통해 신청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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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안창호가 답하지 않은 이유, 윤치호가 작사자이기에애국가 작사자 문제에서 임시정부의 입장과 요인들의 인식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첫 회에서 ‘임시정부공보 애국가 수정안’, ‘김구선생제 한국애국가’ 악보, 그리고 김구의 발언 등을 살폈다. 이번 회에서는 안창호의 발언으로 알려진 1947년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 명의의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의 기록을 살피기로 한다. 작사자가 누구이냐고 물었더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는 대목이다. ‘도산 안창호’는 초판부터 3판까지는 저자가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로 되어있으나 실제는 이광수 저작으로 알려졌다. 이광수의 해방 후 첫 번역서 ‘백범일지’가 선풍을 이르키자 기념사업회가 의뢰하여 썼다고 하는데, 1949년 재판 발행, 1953년 한글 3판 발행, 1978년부터는 ‘흥사단’ 명의로 발행, 이후 ‘춘원 이광수’ 명의로 발행되었다. 이 책 제6장 ‘상해시대 편’(3판 기준) 중 다음의 세 단락이 논란의 대상이다. "정청(政廳)은 매일 아침 사무 개시 전에 전원이 조회를 하여 국기를 게양하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하는 애국가를 합창하였다. 도산은 그 웅장한 음성으로 힘을 다하여서 애국가를 불렀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점잔을 빼던 사람들도 아이들과 같이 열심히 부르게 되었다. 애국가 끝 절에, ‘이 기상과 이 마음으로 임금을 섬기며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사랑하세’하는 것은 ‘이 기상과 이 마음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사랑하세’라고 도산이 수정하였다. 원래 이 노래의 시방 부르는 가사는 도산의 작이거니와 이 노래가 널리 불려서 국가를 대신하게 되매 도산은 그것을 자기의 작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다. ‘애국가는 선생이 지으셨다는데’하고 물으면, 도산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부인도 아니하였다. 정청을 정제(整齊)하는 외에 큰일은 독립신문 발행과 민족운동 거두(巨頭)를 일당(一堂)에 모으는 일이었다.” 첫 단락은 임시정부 청사에서 아침 업무개시 상황으로 안창호를 비롯한 전원이 국민의례를 마치고 업무를 시작한다는 내용이다. 두 번째 단락은 안창호가 애국가 2절 ‘임금을 섬기며’를 ‘충성을 다하여’로 고쳤다는 것과 누가 지은 것인가를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세 번째 단락에서는 안창호의 주 업무가 민족 지도자들을 만나 설득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이 중 문제가 되는 것이 두 번째 단락의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원래 이 노래의 시방 부르는 가사는 도산의 작이거니와 이 노래가 널리 불려서 국가를 대신하게 되매 도산은 그것을 자기의 작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다. ‘애국가는 선생이 지으셨다는데’하고 물으면, 도산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부인도 아니하였다.” 이 대목은 전거(典據)가 없다. 단지 임시정부의 ‘상해시대’라고만 했는데, 일반적인 기산으로는 1919년부터 1932년까지를 말하지만, 이 책의 저자가 이광수라면 그가 상해에 있던 1919년부터 1921년 사이를 말하게 된다. 그런데 이 내용은 이후 몇 개의 버전으로 확산되어 유포되었다. 1950년대부터 70년대 사이 전개된 몇몇 상황은 다음과 같다. "상해 계실 때에 학생들이 애국가를 선생이 지으셨다지요 물으시면 肯定도 不定도아니 하시고~”(1950, 강제환, 安昌浩 雄辯全集, 143쪽) "愛國歌를 안 先生님께서 창작하였습니까?고 仰問함에 대하여 선생은 아무 대답도 아니하셨다.(채필근, 신앙생활, 1955, 합병호) "항간에서는 도산이 지었다고 믿는 이가 많으나, 상해시대에 ‘이 노래는 선생님이 지으셨지요?’하고 도산에게 물으면, ‘웃고 대답이 없었다’는 것이다.”(주요한, 1971, 安島山 全書, 993쪽) 모두 네 가지에서 공통되는 것은 안창호에게"선생이 지었지요”라고 물었다는 것과 이에 대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는 구조다. 이 상황은 주어가 생략된 형태이지만 지난 3회에서 살핀 김구의 발언과 같은 취지다. 즉, 김구가 상해 임정시절 愛國歌 작사자가 누구인가를 묻는 동지에게 "우리가 3.1 운동 때 태극기와 愛國歌로 싸웠는데, 누가 지었는지가 왜 문제인가?”라고 한 것을 말한다. 한 마디로 취지와 구조가 같다는 말이다. 이상을 통해 볼 때 1920년 전후 임시정부에서 딱히 설(說)이라고는 할 수는 없지만 작사자를 안창호인줄로 알았는데 실제는 윤치호라는 것에 대해 논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를 전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단순하게 답을 안 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면, 구조상 긍정으로도, 부정으로도 해석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윤치호 작사를 전제로 안창호에게 이를 부인하는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것이다. 그래서 대답이 없음은, 또는 대답하지 않았음은 곧 윤치호가 작사자라고 긍정한 것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그 이유를 세 가지로 보는 것이 가능하다. 하나는 자신이 작사하지 않았기에 기대하고 묻는 이들에게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해서이고, 둘은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사실대로 말하면 부르지 않겠다는 반발을 우려해서이다. 그리고 사족을 단다면 다른 길을 걷는 윤치호에 대한 배려의 뜻도 담았다고 보는 것이다.(이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상술한다.) 그런데도 굳이 이를 ‘안창호가 자신이 작사라는 사실을 내 세우지 않는 겸손함을 표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앞에서 제시한 세 가지 이유가 없다면 이런 해석을 할 수고 있다. 그러나 굳이 겸손을 표할 이유가 있겠는가라는 의문이 든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일부 문제를 제기한 바가 있었다. 바로 대성학교 수학교사로 재직하여 교장 안창호를 잘 알고 있는 채필근(1885~1973) 목사가 ‘신앙생활’ 1955년 합병호에 비판을 한 바가 있다. "만일 안 선생이 創作하셨다면 直言하셨을 것이다. 誠一貫의 안 선생이 歷史의 大 文字에 대하여 謙讓의 沈黙이 있을 수 없다.” 사사롭지 않은 애국가 문제에 겸양(謙讓)을 표한다는 것은 안창호 답지 않다고 했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의 분석이니 더욱 그렇다. 이는 안창호와 함께한 이들이나 임시정부 초기 애국가 상황을 아는 이들은 결코 작사자를 안창호로 말할 수가 없다는 것임을 알게 한다. 이제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에 있는 문제의 대목에 대한 결론을 맺고자 한다. "상해 임시정부 초기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 인가, 아니면 안창호 당신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안창호는 답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자신이 작사하지 않았음을 밝혀 실망을 줄 필요가 없었고, 윤치호라고 사실대로 말하여 반발을 살 필요도 없었다. 또한 다른 길로 가지만 105인 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윤치호를 배려를 한 결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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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시정부, ‘안창호 작사’ 인식 없었다임시정부에서는 1919년 4월 10일 오전 10시, 첫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회의에서 8개항을 논의하였다. 이 중 제8항은 국가상징 중 국호에 대한 논의였다. 이 때 오른 안(案)은 세 가지로 ‘고려공화국’·‘조선공화국’·‘대한’이었다. 이 중에 이영근 의원이 제청한 ‘대한’을 국호로 결정하였다. 여운형 의원이 "대한이란 우리나라 역사상 오래 사용된 말이 아니고 조선 말기에 잠깐 쓰다가 망한 이름이기 때문에 다시 부활시킬 필요가 없다”는 반대에도 제청자들은 오히려"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는 의미에서라도 대한으로 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 결과다. 결국 당시 중국이 신해혁명 이후 사용한 ‘중화민국’의 ‘민국’을 따서 ‘대한’에 붙여 ‘대한민국’으로 하게 된 것이다. 다음 국기는 비교적 늦은 1943년 6월 29일 국무회의에서 ‘국기양식 일치안(國旗樣式 一致案)’을 확정하여 공포한 바 있다. "국기에 대하야 종래에 설명이 다단(多端)하여 각언 기설(各言 其說)할 뿐 아니라 제도가 일치하지 못하야····제법(製法)과 척도(尺度)와 상징(象徵)···”을 규정하여 공포한다고 한 것이다. 그동안 다양한 논란 있어 뒤늦게 양식의 일치를 정해 발표한 것임을 알 수 있다.(이에 대해서는 여운형이 해방 후 북한정권 수립 과정에서 주역(周易) 등을 들어 태극기를 부인한 사실을 참고할 수 있다.) 그런데 국가(國歌) 또는 애국가에 대해서는 국호나 국기와 같이 공포는 물론 규정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었다. 임시정부와 광복군에서 어떤 경우든 현 애국가 외에 다른 노래(애국가)를 국가 기능으로 사용한 적이 없었는데도 그렇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나름의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수정(修訂) 논의가 있었던 사실에서 확인이 된다. 애국가 ‘수정’, 이는 곡조가 아닌 가사에 대한 문제로, 임시정부의 인식을 학인 시켜준다. 왜냐하면 국호와 국기의 논의와는 전혀 다른 결과이기 때문이다. 우선 초기 상해 임시정부에서의 애국가 상황을 살펴보기로 한다. 임시정부 공식행사에서는 반드시 개회 선언 후 첫 순서로 애국가 4절 또는 1, 4절(首末節)을 부르고, 국기에 대한 ‘최경례’를 하였다. ‘임시의정원회의록’ 제8호에 의하면 개원식에서 "총의장의 사회로 개식을 선언하고 일동이 기립하야 애국가를 창한 후 국기를 향하야 최경례”를 행하였다. 구체적인 모습도 있다. 임시의정원 제34차 회의 취재기의 일부로 <우리통역> 제1호에 수록된 것이다. "전체 의원들이 극도로 긴장하고 엄숙한 정신으로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곡조가 합(合)하지 않아서 3부 합창이 되고 말았다. 또 어떤 분은 첫 머리말을 떼고는 가사를 몰라 목소리를 슬그머니 철회(撤回)하고 만다. 제2절에 들어가자 각자 각창으로 어느 노선생님 한 분이 테너 식으로 고성(高聲)을 치니 창가 진행 중에 그만 모두가 웃고 말았다.” 애국가 제창이 임시정부 의식(儀式)의 첫 순서로 중요한 위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기능이 국가(國歌)이지만 그 명칭은 ‘애국가’이다. 이는 ‘태극기’란 고유명칭 대신 국가상징인 ‘국기(國旗)’로 표기한 사실과는 다른 것이다. 이런 차이 역시 살피게 될 수정 제안 배경과 관계가 있다. 애국가 논의는 비교적 이른 시점에 수정안(修訂案)이 제출되어 부결 처리 하였다. 1920년 3월 의정원 회의에 수정안이 상정되었다. 그런데 현재로서는 당시 안의 구체적인 내용과 제안자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전후 맥락으로 본다면 상정안이 수록된 앞선 일자의 ‘임시정부공보’가 발굴되지 않은 결과일 수 있지만, 안건 자체가 상정되었으나 부결된 것만은 분명하다. ‘임시정부공보’ 1920년 3월 18일자 ‘애국가 수정안’ 기사는 이렇다. "김춘숙 외 3 씨가 제출한 <애국가 수정안>에 대하여 오윤환 씨는 ‘애국가’는 국가가 아니다. 바로 국가를 제정할 필요가 있다면 모르거니와 ‘애국가’는 수정이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 외 2~3 씨의 토론이 있어 제안자에게 퇴각하기로 가결되었다.” 이 기사를 통해 분명히 확인된다. 임시정부는 애국가를 그야말로 임시로 국가(國歌)로 대용(代用)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국가를 제정하는 논의가 아닌 이상 그 내용이 어떠하든 수정 자체를 필요로 하지 않다는 단호함을 표한 것이다. 이는 결국 근본적인 문제가 있어 새 국가를 제정하려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가사의 일부를 수정하려 했다는 전제로 하여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을 시사받을 수 있다. 다음 네 가지이다. 하나는 가사의 일부 자구(字句) 정도를 수정 하자는 측과 전면적으로 애국가 자체에 흠결이 있다며 개정하려는 측이 있었다는 점이다. 둘은 이 중 전자는 안창호가 임시정부 요인으로 근무하고 있는 상황에서 가사를 수정하자고 한 것이니 작사자가 안창호와는 무관하다는 점을 알 수 있게 한다. 만일 안창호설이 있었다면 이런 안이 나올 수도 없었다. 만약 있었다면 직접 요청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셋은 후자의 경우, 애국가 자체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인식한 것으로 보아 작사자 문제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애국가 작사자가 안창호가 아님은 분명한 것이다. 넷은 작사자 문제라면 임시정부에 참여하지 않고, 다른 길을 가는 윤치호를 인식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1897년 발표된 동일후렴 ‘무궁화가’로 부터의 역사성과 3.1 운동 기간 민중들이 선택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와 애국가의 정통성을 부정할 수는 없어 ‘윤치호 작사’ 사실을 들어낼 필요가 없었다. 또한 이 시기 작사, 작곡에 의한 여력이 없었다는 점도 염두에 둔 결과이다. 이상에서 정리된 사항은 해방 후 안창호 작사설을 부인한 자료들과 주요 발언들에서 재확인이 된다. 즉, 1945년 발행 ‘대한국애국가 악보’에 반영된 김구 선생의 인식과 안창호 선생 측근으로 대성학교 교사를 지낸 채필근(蔡弼近, 1885~1973)목사와 해방후 흥사단 재건에 기여한 주요한(朱耀翰, 1900~1979)선생의 입장을 들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 제시하여 강화하기로 한다. 결론적으로, 임시정부의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입장은 이렇게 단호하게 정리한다. "임시정부는 애국가 작사자로 안창호 선생을 염두에 준 바가 없다. 그리고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알면서도 드러내 거론하지도 않았고, 다른 길을 걷는다고 매도하지도 않았다. 적어도 임시정부 요인들은 이 기조를 견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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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92)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유네스코 지정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등재된 것은 2003년 11월 7일이다. 2001년 종묘 제례 및 종묘 제례악이 지정되고 나서 두 번째 맞이한 경사였다. 이에 앞서 1964년 다섯 번째로 국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바 있다. 그만큼 판소리가 갖는 국내외적 위상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유네스코 지정 판소리의 영문명은 'Pansori epic chant'이다. 에픽은 장편서사시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고 챈트는 구송(口誦)이라는 점을 강조한 번역이다. 춘향전 심청전 등 예로부터 전해져 온 장편 이야기를 노래로 꾸민 장르임을 분명하게 해두었다. 또 챈트는 그레고리안 성가를 비롯해 불교의 독경이나 범패 등 성가 혹은 송가를 말하는 것이어서 반복적인 곡조로 부르는 노래 양식임을 알 수 있다. '판'은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 또는 그 장면을 말한다. 처지, 판국, 형편 등의 뜻을 지닌 말이다. '마당'이라고도 하고 '장(場)'이라고도 한다. 판소리가 마당에서 비롯된 예술양식임을 짐작하게 해준다. 따라서 판소리는 어떤 마당에서 옛이야기를 지어 부르는 노래 양식의 하나라고 정의할 수 있고, 여러 과정과 변모를 거듭해 오늘날 독립된 음악양식으로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다. 바닷길 따라 걷는 판소리 마실, 고창 후포에서 보성 율포까지 판소리의 음악적 기원을 전라도 무가로 여기는 연구자들의 주장이 '무가 기원설'이다. 하지만 고전소설이라고 하는 거대 서사가 있고, 판소리꾼으로 불리는 광대들의 활동내력이 있다. 문학적 지형과 음악적 재구성을 두루 살펴야 실체에 더 접근할 수 있다. 두부 자르듯 이것이다 저것이다 일방적인 규정을 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전라도의 억양과 말하기 방식, 노래하고 의사소통하는 방식 등이 주요하게 채택된 장르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거창하게 판소리 미학까지 따질 필요도 없이 소리 자체가 그렇다. 예컨대 '니 광한루 댕개왔노!'라고 아니리를 하면 어색한 것과 같은 이치다. 고창의 바닷가에서 나들이를 시작한다. 우리 판소리의 자존심이라는 김소희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며 판소리를 정리한 신재효의 고을이기도 하다.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후포는 지금도 줄포, 우포, 사포 등 포구 혹은 옛 포구들에 쌓여 줄포만을 형성하는 지류 중 하나다. 김소희 생가는 마을로부터 포구 쪽으로 분리되어 있다. 지금은 바닷물길이 끊겨버렸지만 고대로 거슬러 오를수록 서남해 물길과 맞닿는 공간이다. 후포의 물길을 거슬러 오르면 동학혁명의 주요 인물인 전봉준이 나고 자랐던 고을에 이르고 판소리를 정리하고 가르쳤던 신재효의 고을 고창읍에 이른다. 법성포와 변산반도를 눈앞에 두고 줄포만을 나온 배들은 서남해의 크고 작은 섬들을 거쳐 영산강에 닿고 나주에 닿는다. 김소희는 나중에 박석기가 마련한 담양 지실마을 초당에서 박동실로부터 판소리를 연마하게 되지만 광주가 영산강의 상류라는 점에서 그 문화적 맥락은 서남해 바닷길과 무관하지 않다. 서편제와 여성 판소리꾼의 탄생에 주요한 역할을 했던 흥선 대원군과 신재효의 드라마틱한 삶도 어쩌면 이 물길들을 통해서 탄생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신재효의 아버지가 수도한양에 건정(말린 물고기)물류 사업을 하며 큰돈을 벌었다는 점, 신재효 땅을 밟지 않고는 고창 땅을 지날 수 없었다는 항간의 이야기도 조선후기 판소리 후원자들의 지형을 설명해주는 풍경들이다. 고창에서 물길을 따라 내려오면 영광, 함평, 무안, 목포를 거쳐 나주 영산포에 이른다. 서편제의 확산이 사실상 나주사람 정재근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점 인정한다면 이 물길을 더욱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나주를 중심으로 한 전라도 서편의 판소리는 광주를 비롯해 여러 바닷길들을 돌며 한 지형을 형성했던 것이다. 근대기 진도와 목포에서 형성한 판소리의 맥락도 눈여겨 봐야 할 대목이다. 일일이 거론할 수는 없지만 목포의 장월중선과 안향련, 진도의 신치선과 이병기를 기억해둘 일이다. 다시 뱃머리를 돌려 해남, 완도, 강진, 장흥, 고흥으로 향하면 우리나라 판소리의 거대 지류와 형성사를 만나게 된다. 우리 판소리를 크게 동편제와 서편제로 나누고 그 하위분류로 보성소리와 동초소리로 나눈다. 동편제의 중요한 줄기 중 하나인 동초제는 고흥 거금도 사람 김연수가 재구성한 양식이다. 그의 호를 따서 동초제라고 한다. 동초제를 평생의 업으로 보듬고 살았던 오정숙은 그녀의 소원대로 일면식도 없는 땅 거금도 스승의 곁에 묻혔다. 서편제의 중요한 줄기 중 하나인 보성소리는 나주사람 정재근의 법통을 이은 정응민이 지금의 보성에서 재구성한 양식이다. 순창사람 박유전을 서편제의 시조로 삼긴 하지만 나주와 보성을 빼면 그 맥락을 제대로 좇기 어렵다. 내륙지역으로 들어가면 구례의 송흥록으로부터 남원, 전주의 소릿길로 이어진다. 하지만 바닷길만 통해서도 우리 판소리사의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 있다. 전라도의 해안을 나들이하며 철썩이는 파도와 탁한 뻘물과 옹기종기 모여 앉은 섬들을 마주한다. 판소리를 품은 움직이는 그림, 아니 이 풍경은 어쩌면 판소리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남도의 판소리 마실을 가려면 바닷길을 따라 둘러보기를 권한다. 판소리의 탄생과 형성 판소리의 시작은 통상 숙종 연간으로 본다. 유진한이 지은 춘향가가 1754년(영조 30년)이라는 점에서 그 앞 시기인 1674년에서 1720년 사이(숙종 재위기)에 발생한 장르로 보는 것이다. 이에 앞서 광대들이 지어 부르던 노래나 연극 연행을 토대로 보는 견해에 의하면 조선 전기로 소급해 올라갈 수도 있다. 광대들의 연행 '광대소학지희'를 근거 삼은 해석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판소리로 정착된 것은 19세기 말경으로 본다. 문학적 내용이 풍부해져 형식이 완성되었고 양반층을 포함한 여러 지층의 동호인들을 양산해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후원자(패트런)들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데 양반층의 이념과 기호가 반영된 시기를 전기판소리라 하고 중상인 계층의 부상과 후원을 받게 되는 시기를 후기판소리라 한다. 판소리 연행 시기를 굳이 나누자면 형성기, 전기 판소리, 후기 판소리, 무형문화재와 유네스코 지정기 등이 되겠다. 판소리를 고려시대로 소급해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은 노래 양식이나 이야기의 편성 혹은 연행 문법들이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명의 고수와 한명의 소리꾼이 짝을 이루는 양식이 언제부터 고착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느 시기부터인가 판소리의 고유한 법제로 자리를 잡게 된다. 일고수 이명창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고 소리꾼, 고수, 관객을 3요소로 보는 관점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장단과 선율에 싣는 소리, 말로 설명하거나 묘사하는 아니리, 몸짓으로 표현하는 발림(너름새라고도 한다) 등이 판소리의 중요한 구성요소로 정착되었다. 판소리 창법은 아정한 음악이라고 하는 가곡이나 가사, 시조와는 판이하게 다르게 탁성을 강조하는 편이다. 수리성이니 천구성이니 하는 발성 관련 용어들이 그래서 나왔다. 수리성은 쉰 목소리처럼 껄껄하게 내는 목소리를 말하고 천구성은 타고난 명창의 틔어 나오는 소리를 말한다. 판소리를 경상도 방언이나 평양 방언으로 노래하면 그 맛이 살지 않는 이유와 견주어 살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판소리 문법이나 발성의 토대는 전라도 방언 혹은 전라도 말하기 방식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또랑광대 판소리, 영어로 부르는 판소리, 현대음악들과의 콜라보레이션 등 다양한 시도들이 일어나고 있다. 또 다른 예술장르로 발전할지, 판소리의 무한한 확장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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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문화동행’ 원년으로 삼아 양국 문화협력 확대문화체육관광부는 ‘한미동맹 70주년’을 계기로 2023년을 ‘한미 문화동행(同行)의 원년’으로 삼아 양국의 문화교류·협력 사업을 확대한다. 박보균 장관은 "2023년은 ‘글로벌 포괄적 전략동맹’으로 문화가 한미동맹의 주요한 연결고리이자 핵심 추동력으로 작동하는 원년이 될 것”이라며 "‘한미 문화동행’을 통해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동맹이자 자유와 연대라는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한미동맹이 한 차원 더 발전하고, 양국 교류 협력의 지평이 획기적으로 확장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라고 밝혔다. 한미관계의 새로운 시대를 열 청년세대의 교류를 확대해 양국 청년들 간 신뢰와 우정을 나누고 한미 문화동행의 미래 기반을 다진다. 먼저, 인문학을 통해 양국 청년들이 한층 가까워진다. 양국 청년들은 4월 28일(금)부터 세 차례 국립중앙도서관이 주관하는 인문 교류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영화와 도서 등을 주제로 한 인문학 강연을 듣고 토론한다. 참가자들은 한국전쟁과 분단의 아픔이 서린 DMZ 현장도 함께 방문해, 한미동맹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길 예정이다. 미국 워싱턴 의회도서관에서도 6월에 양국 청년을 대상으로 한미관계에 대한 인문학 강연을 진행한다. 공연 분야에서의 한미 양국 청년 교류협력도 활발해진다. 클래식·무용 분야 콩쿠르 석권 등 K-클래식 돌풍을 이끌어낸 한국예술종합학교는 미국대학들과 활발한 교류를 추진한다. 한국예술종합학교는 미국 노던 일리노이대에서 사물놀이 강의를 운영하고, 무용 전공 학생들의 캘리포니아 공연을 추진하는 등 다양한 예술교류를 계획하고 있다. 한국 창작뮤지컬의 해외 진출을 위한 ‘K-뮤지컬 로드쇼’도 10월에 브로드웨이에 올라 한국 신진예술가의 미국진출을 지원한다. 한편 5월에는 외교·안보, 경제, 사회·문화 관점에서 한미동맹 역사를 다룬 KTV 방송 프로그램 3부작을 방영하고, ‘K-인플루언서*’로 활동하는 미국의 청년 유튜버들이 양국에서 열리는 한미동맹 70주년 기념행사 현장을 취재하며 청년세대의 관심과 호응을 높인다. 한국과 미국이 문화로 나눈 돈독한 우정은 70년 전 결성된 안보 동맹만큼이나 역사가 깊다. 1950년대 한국의 젊은이들은 AFKN(주한미군방송)을 통해 미국의 재즈, 블루스 음악을 접하게 되었고, ‘BTS’의 빌보드 뮤직어워드 수상, ‘블랙핑크’, ‘트와이스’ 등 K팝 그룹의 빌보드 차트 점령은 오늘날 K-컬처에 대한 미국 MZ세대의 열광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미국 예술계도 샌프란시스코 오페라(SFO)의 첫 여성 음악감독으로 선임된 김은선, 차세대 K-클래식 주자 피아니스트 조성진과 임윤찬의 활약에 주목하고 있다. 문체부는 이와 같은 한미 문화교류를 더욱 공고히 하는 문화동행의 첫걸음으로 워싱턴, LA, 뉴욕 등 미국 현지에서 양국 간 문화교류를 본격 추진한다. 비디오 아트의 거장 백남준 다큐멘터리 상영회(4. 12. 링컨센터)와 소프라노 조수미가 참여하는 한미동맹 70주년 기념 콘서트(8. 11. 월트디즈니콘서트홀)와 국립무용단의 ‘묵향’ 공연(10월) 등 현지 문화예술기관과 협력해 다양한 행사를 마련한다. 또한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 우승으로 화제인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뉴욕 필하모닉과의 협연(5. 10.~12. 링컨센터)도 예정되어 있어 K-클래식을 통한 교류도 더욱 활력을 띨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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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관현악의 ‘내일’에 공감!지난 3월 10일(금) 서울시 여의도 KBS홀에서 KBS국악관현악단 제260회 정기연주회 ‘내일’이 열렸다. 지난 1월 위촉된 박상후 제6대 상임지휘자의 첫 정기연주회이기도 하다. 박 상임지휘자는 지난 2월 위촉 기자간담회에서 "정기연주회는 순수예술단체로서 악단의 예술적인 목표와 정체성을 보이는 기회로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으며, 그것을 이번 무대에서 구현했다. ‘내일’이라는 주제로, 관객과 함께 국악관현악의 과거, 현재를 들여다보고 미래를 조명한다는 취지를 갖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존의 전통적인 방식의 음악적 소재와 구성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음악적 세계를 구축하며 국악관현악의 장르적 색채를 만들어가는 네 명 작곡가들의 작품을 선보였다. 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 / 이해식(1943-2020) 작곡 - 국악은 춤추듯 쉽고도 재미있다. 곡의 도입부는 기존의 창작국악에서 듣지 못했던 경쾌한 약강 리듬으로 새롭지만 익숙하게 다가온다. 마치 시골의 장난기 가득한 소년과 함께 뛰노는 강아지가 연상될 정도로, 토속적이지만, 경쾌하면서도 중독성 있는 가락이 반복된다. 이어지는 탬버린의 리듬은 현대적이면서도 국악기들 안에서 녹아든다. 현악기들의 적절한 농현은 경쾌함을 더한다. 이후 북의 힘찬 독주와 함께 곡의 강렬한 전환을 알린다. 다시 주제선율이 반복되면서, 처음의 가락이 이어지고, 관객에게 각인된다. 리듬에 색을 더하는 타악기들의 연주도 인상적이다. 경쾌한 주제선율이 국악적 연주와 어우러져, 순수한 동심을 연상시키고, 춤을 자극한다. 춤은 자연 안의 바람처럼 인간에게 내재된 또 다른 바람일 지도 모른다. 이 곡은 1990년대 ‘젊은이를 위한 춤의 말Ⅱ’, ‘젊은이를 위한 춤의 말’과 함께 젊은이들이 국악을 쉽게 이해하기를 바라는 취지로 창작된 세 작품 중 하나로 알려졌다. 젊은이들이 국악의 세계로 입문하도록 토속적이지만 쉽고도 경쾌한 가락을 신선한 방식으로 반복하여 들려줌으로써 각인시킨다. 이해식 작곡가는 민요, 무속음악 등에 뿌리를 두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민속음악은 그 특성상 인간의 삶과 노동의 일부였으며 자연 또한 그러했다. 때문에 ‘춤’, ‘바람’ 역시 작곡가에게 음악적 영감을 주는 주요한 소재였을 것이다. 하루(Haru) / 토머스 오즈번(Thosmas Osborne) 작곡 - ‘cycle(주기, 순환)’의 한국음악적 형상화 곡은 ‘해 뜨는 아침’, ‘한낮의 폭풍우’, ‘황혼’, ‘보름달’ 4악장으로 구성되었으며 마치 기승전결로 삶의 굴곡과 주기를 말하는 듯하다. 자연을 소재로 한 서정적인 곡이면서도 ‘주기·순환(cycle)’을 삶의 주요 과정으로 보고, 나아가 삶과 삶을 잇는 ’윤회‘의 과정까지 맥을 같이하는 동양적 메시지가 강한 곡이다. ‘해 뜨는 아침’ 도입부에서, 고음 가야금의 빠른 연주와 저음 아쟁의 깊은 농현이 주고받는 듯한 연주는 신비롭고도 긴장감이 감도는 새벽을 연상케 하며, 은은한 주발(놋그릇 모양의 금속 타악기)의 합류는 고요를 감싸는 듯하다. 악기들이 합류하고, 박자는 빨라지며 아침 해를 맞이하는 절정을 맞이한다. 아쟁의 활을 튕기는 듯한 연주(살탄도, Saltando)는 긴박감을 더하는 등 악기들의 연주에서 다양한 시도가 엿보인다. ‘한낮의 폭풍우’ 강렬한 단조 느낌의 합주로 불안, 긴장을 담은 시작이다. 아쟁이 강한 음으로 곡을 주도하며 북 등의 강렬한 타악기의 빠른 두드림으로 긴장의 극대화에 이른다. 특히 곡의 절정에서 꽹과리 연주는 관현악 안에서 어울리지 않을 듯하지만, 가장 한국적인 순간을 만들어냈다. ‘황혼’ 거문고를 2개의 술대를 이용하여 나지막하고도 긁는 듯한 소리로 시작한다. 작은 소리의 독주는 더 집중하게 한다. 아쟁의 선율에서 나오는 굵고도 단조 느낌의 곡이 또 다른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보름달’ 생황 특유의 신비로운 화음으로 시작한다. 양금의 선율도 그 신비로움을 더한다. 가야금, 대금 등의 악기들의 합류로 서서히 오르는 달을 떠올리게 한다. 박자는 서서히 빨라지며, 꽹과리 등 타악기 등 악기들의 강렬한 합주는 보름달의 밝음과 완전의 극치를 말하는 듯하다. 다시 고요함 속에서 1악장의 곡이 반복되며, 점차 절정을 맞으며 곡은 마친다. 1악장 곡의 반복은 아마도 ‘주기·순환(cycle)’의 메시지를 전하는 듯하다. 탄탄한 음악적 구성은 물론, 전체적으로 다양한 국악기들과 다양한 연주법들이 등장하며,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작곡가가 노력해왔던 국악기에 대한 탐색과 고민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곡이다. 작곡가 토머스 오즈번(Thomas Osborne)은 동·서양, 전통·현대 음악을 넘나들며 음악적 시공간의 경계를 허무는 폭넓은 작품세계를 펼쳐온 작곡가이며, 다수의 한국 창작곡들을 발표해오며 한국음악과의 활발한 교류를 이어오고 있다. 파도(波濤): 물의 춤 / 장석진 작곡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곡가 전체 합주로 강렬하게 시작한다. 이후 현악기의 빠른 박자와 피리의 힘찬 연주, 대금은 망망대해를 연상케 한다. 이후 전체 합주로 이어지는 웅장함은 높은 파도가 쏟아지는 듯하다. 가야금, 거문고 등의 연주와 함께 곡은 다시 느려지고 대금이 합류하며 고요한 바다를 연상케 한다. 해금 합주는 구슬픔과 삶의 역경이 느껴진다. 양금, 가야금 등의 신비로운 음색이 돋보이며, 이어지는 저음의 현악기, 고음의 해금 연주로 망망대해를 헤치는 듯하고, 이후의 북소리는 점차 거세지는 파도를 연상케 한다. 이 웅장함과 힘, 음색, 선율의 감동은 파도 안에서 휩쓸리는 듯한 강렬함을 느끼게 한다. 이 곡은 작년 성남시립국악단 송년음악회에서 위촉 초연된 곡으로 창작음악의 현재를 이해할 수 있는 곡이기도 하다. 장석진 작곡가는 서양음악과 국악 모든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대금, 소아쟁, 거문고를 위한 협주곡 ‘내일’ / 작곡 김성국 - 그들의 내일을 사는 오늘과 다음 내일, 그리고 창작국악의 내일 이번 공연에서 가장 꽉 찬 무대는 단연 ‘대금, 소아쟁, 거문고를 위한 협주곡 ‘내일’’이었다. 관객들의 호응이 압도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서울시 네 개 국악관현악단 구성원들이 한 무대에서 관객을 만났기 때문이다. 김상훈(아쟁, 서울시국악관현악단), 오경자(거문고, 국립국악관현악단), 류근화(대금, 국립국악원 창작악단) 연주자가 수준 높은 연주로 무대를 빛냈다. 이 곡은 남도 시나위를 바탕으로 새롭게 구성한 곡이며 떠나간 이들, 남은 자들의 성찰, 그리고 그들이 바라던 내일을 살고 있는 우리를 위한 굿이라는 사회적 의미도 갖는다. 과거와 현재를 바탕으로 내일을 준비한다는 면에서 현재의 국악관현악에도 의미 있는 선곡이다. 연주자들의 높은 음악적 역량이 요구되는 시나위답게 각 협연자들은 애절한 남도 가락을 타고 자신만의 모든 음악적 역량을 쏟아내며, 관객을 압도하는 완벽한 연주를 보여주었다. 아쟁은 깊고도 구슬픈 음색으로 위로를, 거문고는 묵직하고도 짙은 음색으로 진중함을, 대금은 훨훨 나는 새와 같은 부드럽고 고운 음색으로 처연함을 전했다. 또한 관현악의 웅장함과 엄숙함이 더해져 감동은 더욱 무르익었다. 무엇보다 장단 위에서 협연자들과 악단이 시나위에서와 같은 즉흥 연주를 격렬하게 펼치는 부분은 ‘한(恨), 슬픔, 위로, 벅차오름’ 등 복합적인 감정이 동시에 스쳐지나가는 경험을 하게 했다. 다른 듯 같은 길을 가는 연주였으며, 저마다의 음악으로 관객에게 말했으며, 저마다의 악기는 저마다의 인간 군상이었으며, 그들의 말하는 방식이었다. 각자의 곡을 연주함에도 불구하고 합주로 느껴지는 이유는 하나의 장단 위에서, 우리 선율로, 우리만의 정서를 공유하는 ‘한(恨)과 공동체’의 음악 ‘시나위’이기 때문일 것이다. 연주가 끝난 후, 협연자들과 악단은 서로를 격려하고 축하해주었으며, 협연자들은 손을 맞잡고 이 날의 감동을 관객들과 공유했다. 또한 박 상임지휘자는 각 연주 후마다, 곡의 주요 연주자들이 단독으로 관객에게 인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관현악은 지휘자만의 것이 아닌, 연주자들과 함께 만드는 것임을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공감을 이끌었다. 공연이 끝난 후, 관객들은 공연의 감동이 가시지 않은 채 감상평을 주고받으며 KBS홀을 나섰다. 초등학생 손녀와 함께 온 여성은 다음과 같이 전했다. 신00 / 60대,(여) 국악은 한복입고 하는 옛 음악으로만 알려졌는데, 개인적으로 오늘 공연 보고나서 드는 생각이, 서양 관현악이랑 어우러져서 독특한 우리만의 독특한 음향이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국악이 좀 더 활성화되면, 서양 클래식 못지않게 세계화 되고, 시너지 효과도 있을 것 같아요. KBS국악관현악단 공연을 두 번째 관람한다고 전한 50대 부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00 / 50대, (남) 화끈하게 좋았어요.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클라이맥스로 가면서 집중하게 되더라고요. 한00 / 50대, (여) 하모니가 너무 좋더라고요. 웅장하면서도 화려함이 있고요. 국악 비전공자인 20대 한 여성은 국악을 듣고자 혼자 왔다고 전했다. 전00 / 20대, (여) 평소에 국악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특히 꽹과리 소리가 좋아서 혹시 들을 수 있을까 싶어서 왔는데, 마침 연주 부분이 있더라고요. 소리가 미래를 이야기 하는 것 같아서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오늘 연주에서 3중주 부분이, 특히 거문고 연주가 너무 좋았어요. 위아래 오르내리면서 타는 듯한 소리가 다른 악기에 비해서 저한테는 거문고가 더 잘 느껴지더라고요. 산조는 대화 같고, 합주는 발표하는 느낌이랄까? 관현악만의 매력이 있는 것 같아요. 국악을 전공하는 10대 고등학생들은 배움의 과정에서 얻은 자극과 영감으로 자신의 전공과 관련하여 느낀 특별한 감동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홍00 / 10대, (여) 거문고 연주(3중주)를 처음 듣는 순간, 눈물이 나왔어요. ‘아, 나는 그 동안 감정을 안 실었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마음가짐을 다시 가지게 됐어요. 김00 / 10대, (남) 대금 연주(3중주)에서 꺾는 음, 태(太)농음이 기가 막혔어요. 처음 도입부 솔로 부분에서 반음, 음정관계, 연주 모든 것이 멋있었어요. 김00 / 10대, (여) 거문고 연주(3중주)할 때 대점이, 힘 조절이 중요한데 오늘 연주는 정말 완벽했어요. 아쟁 연주도 훌륭했고 소리의 여백을 잘 채워주셨고요. 관현악단 호흡도 정말 훌륭했어요. 노00 / 10대, (여) 대금과 소금에 비해서 중금 연주를 들을 기회가 많이 없는데, 오늘 중금 연주를 처음 들었거든요. 너무 좋더라고요. 색다른 충격이었어요. 국악(타악)을 전공한 20대 아들과 동행한 아버지는 이전에도 KBS국악관현악단 공연을 몇 차례 관람했다고 전했다. 부자는 각자의 감동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김00(아버지) / 50대, (남) 이번 공연은 새롭고 다채로운 것 같아요. 지휘자가 바뀌어서 그런지 음악들이 새롭고, 곡도 좋았어요. 개인적으로 마지막 곡이 좋았어요. 협연자들이 음악적 표현도 잘 살려주시고, 관현악단과도 잘 어울렸고요. 곡이 역동적이면서도 서정적인 느낌 모두가 살아있더라고요. 김00(아들) / 20대, (남) 악기 편성도 좋았고, 웅장하고, 음향시설도 좋아서 소리도 잘 들렸어요. 곡마다 분위기도 잘 살아서 집중할 수 있었어요. 서정적일 때, 웅장할 때 그 때마다의 감성이 잘 표현된 것 같았어요. KBS국악관현악단의 예술적 목표와 정체성 앞서 언급했듯이, 박 상임지휘자는 정기연주회를 악단의 예술성과 정체성을 드러내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고 전했다. 이번 연주회의 곡 구성에서 그 의지와 고민을 엿볼 수 있었다. 민속음악에 뿌리를 두고 현대적 어법으로 한국적 창작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이해식의 ‘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 공간을 초월하여 외부의 시선에서 한국적 관현악을 선보이는 토머스 오즈번의 ‘하루’, 서양음악과 창작국악을 넘나들며 폭넓은 음악적 스펙트럼을 가지는 장석진의 ‘파도:물의 춤’, 그리고 떠난 이들의 미래, 즉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의 다음 미래를 향한 ‘내일’과 그 안에서 협력과 상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3중주 협주곡 ‘내일’. 이것들이 바로 KBS국악관현악단이 바라본 과거와 현재이며, 지향하는 ‘내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또한 네 곡 모두 전통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과 현대 음악에 대한 탄탄한 기량, 그리고 전통음악과의 결합 지점을 찾으려는 부단한 노력이 반영된 곡들이다. 전통국악이 과거의 음악을 탐색한다면, 유일하게 현대를 다루고 논할 수 있는 국악 장르가 창작국악일 것이다. 그 특권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전통음악과 우리를 잇는 가교로서, 한국음악의 새로운 전통으로서 의미 있는 역할이기를 기대한다. 다음 정기연주회는 9월 예정되어 있으며, ‘시청자 감사음악회’가 4월 16일 ‘실내악 시리즈Ⅰ- 명곡 Talk+’라는 주제로 관객을 찾아간다. ‘시청자 감사음악회’는 보다 대중적인 성격을 가지며 9월을 제외하고 11월까지 매달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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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닮은듯 다른 나라’ 헝가리- 駐 한국문화원한류 문화가 전 세계적 호응을 얻고 있는 지금, 한국문화가 그 어느 때보다도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이러한 때, 각국의 한국문화원은 현지에서 다양한 기획과 활동 등 다각도로 그 가교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국악신문에서는 각 국의 한국문화원장과의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한국문화원의 활동과 현지에서 한류가 지속 가능한 전 세계적 문화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조명해보고자 한다.(편집자 주) 헝가리(Republic of Hungary, 헝가리공화국)는 ‘우리와 닮은 듯, 다른 나라’로 압축하여 말할 수 있다. 중유럽에 위치하고, 크기는 한반도 남한 면적과 비슷하다. 인구의 대부분이 ‘마자르족’(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며, ‘마자르어’라는 민족 고유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 이 외에도 공통점이 있다. 우선, 언어학적 분류에서 ‘우랄·알타이어’ 어족(語族)에 함께 속하여 비슷한 언어적 특성을 가지며, 역사적으로 주변국으로부터 침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와 영토를 지켜온 민족이라는 점이다. 북한과는 1948년 11월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교류를 이어왔으며, 남한과는 1989년 2월 수교 이래, 올해 수교 34주년을 맞는다. 헝가리에는 약 4,500명의(외교부 재외동포현황, 2021) 교민이 거주하고 있다. 2012년 수도 부다페스트에 한국문화원이 설립되었으며, 2019년 11월, 현재의 부다페스트 프랑켈레오 거리로 확장, 이전하여 지상 5층 지하3층, 총면적 약 8000㎡로 유럽 최대 규모의 한국문화원 시설을 갖추고 있다. 다양한 프로그램과 기획으로 문화사절 및 한류의 구심점으로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이 중심에 있는 인숙진 주헝가리 한국문화원장으로부터 현지 활동에 대해 들어보았다. Q. 원장님, 올해 주 헝가리 한국문화원에서 기획하시는 주요 행사들은 어떤 것들이 있나요? A. 공연, 전시, 영화, 한식, 한국문화 강좌, 한국문화제, 찾아가는 한국문화원, 어린이 미술교실, 인문학 프로그램, 케이팝(K-pop) 아카데미 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사업이 있습니다. 주재국 국민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다양한 한국문화의 매력을 소개하기 위해서인데요, 우선 올해 계획하고 있는 대표적인 공연 몇 가지를 말씀 드리면, 9월 한국문화제 기간에 국립국악원 종묘제례악을 비롯해 한국의 퓨전 국악인들을 초청 민요, 거문고 등 K-국악을 집중적으로 소개할 예정입니다. 또한 헝가리 시어터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4월에는 죄르(Győr, 헝가리 북서부에 위치한 도시)에서 오마이라이프 무용단이, 6월에는 MUT Dance(한국전통춤을 기반으로 한 창작무용의 한 종류)가 초청되어 죄르와 부다페스트에서 공연을 선보일 예정입니다. 이 때 한국 공연을 찾는 관객들을 위해 한국문화를 소개하고 체험할 수 있는 행사도 함께 준비하고 있습니다. 전시로는 3월 부다페스트 포토 페스티벌에 ‘한국 특별 섹션(K-section)’으로 참여해 한국의 대표적인 사진작가 12명의 사진작품을 소개하고, 10월엔 아트 마켓 부다페스트에 한국 특별 부스를 운영할 예정입니다. 부다페스트 아트마켓은 중유럽 최대 아트마켓인데요, 이를 통해 국내 시각 예술 작가들이 국제 무대 진출할 수 있는 기반과 힘이 되길 기대합니다. 8월엔 한국의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 작가주의 만화) 전시를 통해 만화와 그래픽 노블 등 한국 미술의 다양성을 소개할 계획입니다. 헝가리 현지에서도 한국 웹툰, 한국 만화 소설 등이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인기가 굉장히 높은데요, 이번 전시를 통해 웹툰과 만화는 물론 일반 만화보다 철학적이고 진지한 주제를 다루는 한국 그래픽 노블의 매력도 현지인들에게 전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영화제도 우리 문화원의 중요한 사업입니다. 최신 한국영화부터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등 약 30여 편의 영화를 일주일간 집중적으로 소개하고, 감독초청 GV(Guest Visit) 등 부대행사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올해로 영화제가 16회를 맞이하는데 극장이나 온라인 플랫폼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영화들도 상영하다 보니 현지 관객들의 호응이 아주 좋습니다. 그리고 헝가리 유일 국제영화제인 미슈콜치 국제영화제와 협력해 영화제 기간에 한국영화 특별상영 행사도 진행할 예정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다수의 사업이 헝가리 내 대표 문화예술축제 및 현지 문화예술기관 함께하는 사업인데요, 문화원은 현지 기관과의 지속적인 협력 및 교류를 통해 서로에 대한 이해를 높여가고자 합니다. Q. 헝가리 도시에서 우리의 종묘제례악이 울려 퍼지는 일은 상상만 해도 가슴 벅찬 일입니다. 하지만, 헝가리 현지인들이 우리의 전통음악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기도 한데요, 9월에 개최될 한국문화제에 대해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A. 헝가리는 전통·민속 음악의 중요성을 알고, 타국 전통 음악에 대해 존중과 관심을 보이는 문화적 특징이 있습니다. 헝가리의 대표적인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는 헝가리 민속 고유의 음을 작곡 기법에 도입하기도 했고, 헝가리 고유 민속 음악의 기원 연구를 위해 리스트 아카데미를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문화적 배경과 특징을 고려해 작년 경기시나위 오케스트라, 이날치 등 K-국악을 현지에 소개했는데요, 두 공연 모두 전석이 매진될 정도로 높은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에 힘입어 올해 한국문화제의 주제를 K-국악으로 선정했습니다. ‘K-국악 : 정악에서 민속악까지’라는 주제로 국악의 여러 면모를 다채롭게 보여줄 수 있는 공연과 함께 국악 속에 깃든 정신을 체험할 수 있는 여러 행사를 집중적으로 개최할 예정입니다. 국립국악원, 남도국립국악원, 젊은 국악인을 초청해 종묘제례악부터 민요, 거문고, 판소리 등 다양한 스펙트럼의 전통 공연을 선보이고, 국악을 소재로 한 영화상영, 악기 체험행사, 한·헝 민속 음악 관련 전문가 심포지엄, 종묘대제 관련 교육 프로그램 등 부대행사도 풍성하게 준비하고 있습니다. 전통 음악 워크숍과 체험 프로그램의 경우 현지 대학 등 교육 기관과 협업해 진행할 계획인데요, 이를 통해 각 학교에서 지속적으로 한국 음악과 문화를 소개하고 배울 수 있는 정례 프로그램으로 정착되길 희망합니다. Q. 1년 동안 펼쳐질 행사들 하나하나가 모두 기대됩니다. 준비를 위해 많이 바쁘실 것 같은데 진행 중이거나 앞둔 계획은 어떤 것인가요? A. 앞에서 잠깐 말씀드린 ‘자연과 사람, 12인의 시선으로 노정한 한국현대사진’전 준비가 한창입니다. 작품 설치를 위한 공간 디자인부터 도록 등 홍보물 제작 및 감수, 작가와의 대화 등 부대행사 준비까지 많은 일들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습니다. 여름 시즌인 7월과 8월에 개최 될 ‘KoreaON : 한국의 날’, ‘헝가리 국가민속유산 축제’참가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KoreaON : 한국의 날’ 축제는 헝가리 한유(Han-You)문화재단(현지인 한국문화동호회들로 구성된 사단법인) 및 현지 한국문화 동아리 등 헝가리 내 한류커뮤니티와 협업하여 열리는 한국문화페스티벌입니다. 작년에는 헝가리 중심 야외 공원에서 개최했는데 1만 명이 넘는 분들이 축제를 찾아주실 정도로 인기가 있었습니다. 올해는 문화원에서 행사를 개최할 계획입니다. 유럽에 있는 한국문화원 중 제일 큰 문화원이라는 우리 문화원만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해, 도서관, 한식체험관, 전통문화체험관 등 문화원의 다양한 공간을 한국문화 테마파크로 꾸밀 예정입니다. 축제기간동안 문화원이 헝가리 속 작은 한국이 되어 관람객들에게 한국에 놀러온 것 같은 경험을 선사할 수 있길 기대해봅니다. 헝가리 국가민속유산 축제는 8월 20일 헝가리 건국일을 기념해 '부다 왕궁'에서 개최하는 매년 7만명이 넘는 예술가와 관람객이 방문하는 대규모 축제입니다. 작년에는 한국이 주빈국으로 초청되어 낙화장, 단청, 민화, 한글서예, 지승공예, 생활 도자기 등 체험 부스와 함께 사물놀이, 전통 무용, 대형 탈춤 공연 등을 선보일 수 있었습니다. 특히 헝가리 대통령 노바크 커털린(Novák Katalin)이 직접 방문해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올해도 국가민속유산축제에 참가할 예정으로, 어떤 프로그램으로 참가할지 축제 조직위와 협의하고 있습니다. Q. 헝가리 한국문화원이 가지는, 타국의 문화원과 다른 특징은 무엇인가요? A. 헝가리는 한류 동아리 활동이 활발하고, 장르, 연령대, 지역 등에 편중됨 없이 다양하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케이팝, 한국 드라마 등 대중문화 동호회도 많지만, 서예, 조각보, 가야금, 전통무용 등 전통분야 동아리도 많고요. 활동만 활발한 것이 아니라 실력도 우수합니다. 가야금 동아리 ‘민들레’의 경우 해외문화홍보원에서 주관하는 K-커뮤니티 페스티벌 민요 부문에서 1위를 수상했고(2022년), 전통무용동아리 ‘무궁화’는 한국에 초청되어 국립국악원 공연장에서 공연도(2015. 07.) 했습니다. 이렇게 다양하고 우수한 동아리들과 협력하고 그들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는 것이 우리 문화원의 특징이자 장점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한국문화 연합 동아리인 한유문화재단의 ‘KoreaON:한국문화페스티벌’, 부다페스트, 페치 등 지역 영화 동아리들이 주최하는 ‘Korean Movie Road’, 데브레첸 한류 동아리들이 개최하는 ‘한국문화의 날’ 등 많은 동아리 행사를 문화원이 지원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명장과 명인들을 모셔와 동아리를 위한 특별 강좌를 열기도 하고 서예, 전통무용 등 일부 동아리의 경우 실력이 우수한 분은 문화원 문화강좌 선생님으로 활동 할 수 있도록 기회도 드리고 있습니다. Q. 인터뷰를 마치면서, 한국에 있는 국민(동포)들에게 혹은 국악신문 독자들에게 당부하시고 싶으신 것이 있으시다면~. A. 현재 한국과 헝가리 양국은 다양한 분야에서 좋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지난 몇 년간 한국기업의 헝가리 투자 증가로 현지인들이 한국에 대해 좋은 인식을 가지고 있고, 문화원의 문화강좌 수강신청 인원이 배로 증가하는 등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대한 현지의 관심도 더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좋은 관계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역시 양국의 문화교류가 중요합니다. 문화적 교류가 서로에 대한 이해와 호감을 높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헝가리 한국문화원이 더욱 열심히 노력하고 활동하겠습니다. 많은 관심과 지원을 부탁드립니다. 헝가리인들은 1948년 북한과의 수교 이래, 한국문화와 역사를 접하기 시작했다. 이후, 남한과의 수교를 통해, 어쩌면 그 연장선상에서 한국의 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관심은 교육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2008년, 전 주한 헝가리대사 초머 모세(2018-2022 재직) 교수에 의해 헝가리 최초로 대학교(외트뵈시 로란드 대학교)에 ‘한국학과’가 설립되기도 했다. 이것은 헝가리 내에서 한국문화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고찰을 위한 의지를 반영하기도 한다. 앞서 언급된 ‘한-유 문화재단’ 또한 주목할 만하다. ‘한-유’는 ‘한국(han)과 당신(you)’를 잇는다는 의미와, 헝가리어로 ‘한류’로 발음되는 특징으로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2017년, 19개 동호회(한국영화, 태권도, 서예, K-pop, 가야금, 수공예 등), 현지인 200여명으로 구성된 단체가 정부에 사단법인 설립신고로 이어진 것이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매우 드문 경우이며, 현지에서 한국문화에 대한 선호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반영하는 증거이다. 앞서 인숙진 문화원장이 언급한 것처럼 자신의 전통을 중요시하는 것은 물론, 타 문화와 전통도 중요하게 받아들이는 헝가리 인들의 문화적 포용력 역시 현지 한류문화 성행의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음을 추측케 한다. 이러한 문화적 성장 동력과 함께, 앞으로 헝가리 인들과의 문화적 소통을 바탕으로, 보다 폭넓은 분야에서 함께 상생할 수 있는 과정에 주 헝가리 한국문화원이 더욱 주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국내 독자들의 관심과 응원 역시 이에 힘을 보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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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서예로 읽는 우리 음악사설 (126)우수나 경칩이 물 풀리니 합강정 뗏목이 떠내려 오네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송산에 포아리를 돌아만 가네 창랑에 뗏목을 띄워노니 아리랑타령이 처량도 하네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보매기 여울을 거쳐 나가세 작품감상 뗏목은 신작로가 개통되고 기차가 들어오기 전까지 우리나라 전역에서 사용되던 주요한 화물운송수단이었다. 경복궁을 지을 아름드리 목재를 싣고 정선 아우라지를 출발한 뗏목이 영월을 거쳐 한양 노들나루나 마포나루까지 오는 데는 빠르면 사흘, 늦으면 열흘까지 걸렸다고 한다. 대단한 노동력을 요하였지만 일반 노임에 비해 큰돈을 받을 수 있어서 떼돈을 번다는 말도 여기서 유래한다. 떼꾼들은 노동의 고단함을 아리랑으로 녹였고, 아리랑으로 하룻밤 묵어가는 주막의 스산함을 어루만졌다. 뗏목은 물살을 잘 타야 쉬이 움직일 수 있다. 민체로 물살을 타듯 썼다. 작가 이종선(李鍾宣)은 아호가 한얼, 醉月堂이다. 한국서학회 이사장,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초빙교수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강사, 한국서총 총간사를 지냈고, 지금은 경희대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중국난정서회 서울연구원장, 이즘한글서예가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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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78)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뉴밀레니엄의 변화들이야 각계각층 각 장르 각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나현신,김현주의 "뉴밀레니엄시대 패션에 나타난 '페이크 펀(fake fun)' 디자인"을 참고한다. 2000년 이후 기성복 컬렉션을 보면 오브제의 쓰임새를 엉뚱한 위치로 이동시키거나 착용 위치를 뒤바꾼 스타일 등의 위치 왜곡, 의복의 일반적 형태를 왜곡하고 정상적인 착장 형식을 파괴하는 형태 왜곡, 눈속임 기법 등 현실 세계에서 불가능한 조합과 부조화를 통한 일탈 등이 일상화된다. 보는 이에게 유쾌한 감정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이 '페이크 펀'이 뉴밀레니엄 시대의 주요한 트렌드로 자리매김했을까? 기왕의 패러다임을 전복시키거나 희화화 시키는, 그래서 새 시대를 보다 즐겁고 재미있게 맞이하는 태도들이 두드러졌음을 보여준다. 마치 장난을 좋아하는 도깨비들의 심성이라고나 할까. 이제는 누구 눈치 보지 않고 권세에 주눅 들지 않으며, 기성의 양식과 제도를 비틀어 조롱하거나 비판하고, 그것을 당당하게 패션이나 각 장르들의 전면에 내세우는 시대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월드컵 축구 응원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일사 분란한 동원 체제를 강조하는 듯 보여도 사실은 페이크 펀에서 보여주는 놀이의 수단이기도 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월드컵 응원에 놓인 이 중층적이고 양가적인 태도는 이후 벌어질 촛불집회로 승계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그러나 이것이면서 저것이기도 한 복합적인 존재의 의미를 거리낌 없이 쏟아낼 수 있는 준비를 하였던 시기였던 것 같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기왕의 좌파, 우파의 구분법을 뛰어넘어, 붉은 치장을 두르고 붉은악마가 되었다가 광장의 촛불이 될 수 있었겠는가. 이제 2000년 뉴밀레니엄을 맞이하고 두 번의 십년을 보내고 있다. 이전의 천년과 새로 온 천년은 시간의 분절이라는 관습적 기점의 어떤 비전들을 설정하였나? 만약 설정하였다면 그 비전은 어떻게 이행되고 있나? 한국의 크고 작은 광장을 가득 메우면서 뉴밀레니엄을 열었던 붉은악마와 함께 분노의 여신, 페이크 펀, 내셔널리스트 치우의 등장을 다시 주목해보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붉은 흐름이 어찌 촛불혁명으로 이어졌는지에 대해 톺아보는 것도 놓치지 않으려 한다. 왜 '다시천년'의 기점에 이들이 등장하게 되었으며 그 의미는 또 무엇일지 추적해보는 시간을 마련해보려 한다. 거듭 생각하는 것은 이것이야말로 통과의례였다는 것, 이 의례를 통과하지 않으면 뉴밀레니엄을 도저히 열 수 없었던 불가피한 놀이였다는 점이다. 고작 일 년이 그렇고, 한 세기도 그럴진대 아무려면 한 천년이 그냥 올수야 있겠는가. 나는 지금 유쾌한 반란, 다시천년 벽두의 붉은악마를 애틋하게 추억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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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오엔터, 1조 2천억원 글로벌 투자 유치..역대 최대 규모카카오엔터테인먼트가 글로벌 펀드로부터 1조2000억원 규모의 대규모 투자를 유치 성공을 바탕으로 ‘비욘드 코리아’ 비전 본격화에 앞장선다고 밝혔다. 12일 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은 글로벌 펀드가 한국 콘텐츠 기업에 투자를 결정한 것은 K(케이)-컬처의 위상과 성장 가능성을 인정했기 때문으로 평가된다"고 밝혔다. 박보균 문체부 장관은 "지난해 11월 윤석열 대통령과 사우디아라비아 빈 살만 왕세자 간 한-사우디 정상회담에 따른 외교적 성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도 K-콘텐츠를 우리 경제의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새로운 먹거리 산업으로 육성해나가겠다.”라고 강조했다. 한국의 콘텐츠 수출액은 2021년 기준 124억 달러로가전, 이차전지, 디스플레이 패널을 이미 추월할 만큼 K-콘텐츠는 주요한 수출품목이 됐으며,한국의 수출 지형을 재편하는 게임체인저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상황이다. 문체부는 K-콘텐츠에 대한 해외 자본의 대규모 투자를 계기로 해당 산업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에 나설 예정이다. 우선 올해 역대 최대 규모인 7,900억 원의 정책금융을 공급해 콘텐츠산업의 만성적인 자금난을 완화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K-콘텐츠펀드 출자금을 확대(1,900억 원)해 4,100억 원 규모의 펀드를 조성하고, 프로젝트 제작 완성보증자금 200억 원을 출연해 2,200억 원 규모의 보증을 지원한다. 기준금리 인상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콘텐츠기업의 이자부담을 경감하기 위해 이자의 일부(2.5%P) 지원(40억 원)도 확대한다. 향후 3년간(2023~2025년) 콘텐츠 전문인력 1만 명을 양성해 잠재력있는 인재가 산업현장에서 활약할 수 있도록 지원할 계획이다. 전문가를 통한 도제식 멘토링을 통해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미래인재를양성하는 한편 신기술콘텐츠 융복합아카데미를 통해 콘텐츠 기획·제작 역량과 첨단기술 활용 역량을 고루 갖춘 인재를 양성한다. 예비창업자, 스타트업·벤처기업이 참신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사업화하는 과정도 지원할 계획이다. 또한 창업기업에 대해 단계별로 사업화 자금과사업모델 혁신(법률, 노무, 마케팅 등)을 지원해 창업하기 좋은 기업환경을 조성한다. 특수영상 클러스터, 부산종합촬영소 등 인프라 시설을 대폭 확충해 콘텐츠 기업들이 수준 높은 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도록 제작 환경을 개선한다. 콘텐츠 수출을 전방위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10만 영세 콘텐츠 기업의해외 지사 역할을 할 한국콘텐츠진흥원 해외비지니스센터를 5개소 늘릴 예정이다.(2022년 10개소 → 2023년 15개소) 콘텐츠 해외 진출을 과학적·체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한류데이터센터를 신규로 구축하고 콘텐츠 수출플랫폼인 ‘웰콘’ 기능도 고도화한다. K-콘텐츠와 연관 제조업·서비스업의 동반 해외진출을 지원해 콘텐츠 산업의 경제적 파급효과를 극대화할 예정이다. 구체적으로는 ▲ K(케이)-브랜드 해외홍보관(인도네시아, 2022년 12월 개관)을 통한 콘텐츠, 화장품,식품 등 공동 홍보, ▲ 범부처 K(케이)-박람회 개최, ▲ 한류 연계 마케팅 지원 등을 추진할 예정이다.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특화 콘텐츠 제작 지원 확대 및 수출 지원, 게임 산업에 대한 다년도 지원 방식 도입 등을 통해 K-콘텐츠가국제적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지원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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